경로당에서 냉커피 마신 노인 4명 잇따라 쓰러져…사흘 후 또 다른 할머니, 의문의 죽음
과거 유사 사건들의 범인은 모두 같은 마을 주민들로 밝혀져
경북 봉화군 봉화읍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상류에 위치해 있다. 군청 소재지인 내성리는 행정구역상 ‘내성1리~5리’까지 5개로 나뉘어 있다. 7월15일 내성4리 경로당 회원 41명은 초복을 맞아 점심으로 마을 식당에서 오리고기를 먹었다. 일부는 노인복지관으로 이동해 한 프로그램을 수강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2시쯤부터 A씨(69), B씨(65), C씨(75)가 잇따라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다음 날인 7월16일에는 D씨(78)가 같은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이송됐다. 목격자들은 “손발이 오그라들고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입에서 뿌옇고 끈적한 물이 나오는데 숨을 안 쉬더라”고 증언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식당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한 5명 중 4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C씨가 경로당 회장, B씨가 부회장이다.
처음에는 음식에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식중독을 의심했다. 병원 측은 이들의 소변과 혈액 샘플, 위 세척액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중독물질 검사를 의뢰했다. 봉화군도 가검물을 채취해 경북도보건환경연구원에 보냈다.
냉커피에서 맹독성 농약 성분 검출
국과수 검사 결과 할머니들의 위 세척액에서 2가지 농약 성분이 검출됐다. 2011년도부터 생산이 중단된 맹독성 엔도설판과 살충제로 쓰이는 유기인산이다. 가검물에서는 식중독 관련 세균이나 바이러스 음성이 나왔다.
경찰은 누군가 일부러 음식에 살충제를 넣은 것으로 보고 전담팀을 편성해 수사에 나섰다. 처음에는 오리고기에 독극물이 섞인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지만 4명이 식당에서 나온 후 경로당으로 이동해 냉장고에 보관해둔 냉커피를 나눠 마신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각자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가 한 명씩 발작 증세를 보이며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중태였던 할머니 4명 중 3명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해 퇴원했고, 1명(D씨)은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현장 감식을 통해 감정물 400여 점과 주변 CCTV, 블랙박스 등 86개 자료를 확보해 분석했다. 또 관련자 등 70여 명에 대한 면담조사를 실시하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DNA 검사도 실시했다.
사건 당일 경로당 회원들이 오리고기를 먹은 식당에서는 별다른 의심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경로당 커피잔에서 농약 성분이 나왔다. 회원들은 경로당 회장이 평소 냉커피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눠 마셨다고 했다. 경찰은 경로당 운영을 놓고 회원 간 불화가 있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이에 따라 경로당 운영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커피에 농약을 탔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용의자를 좁혀 나갔다.
경찰 수사 중에 돌발상황 발생
그런데 경찰 수사 도중에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7월18일 오후 E씨(85)가 농약 중독과 비슷한 증세로 마을 병원에 갔다가 상태가 악화돼 안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경찰은 범인의 추가 범행을 의심하고 바짝 긴장했다. E씨는 앞서 쓰러진 4명과 같은 식당 다른 테이블에서 오리고기를 먹었으나 경로당 커피는 마시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E씨를 노리고 누군가 음식물에 농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되는 점도 없었다.
보통 독극물은 먹으면 바로 증상이 나타난다. 앞서 쓰러진 할머니들이 연이어 쓰러진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E씨가 사건 당일 농약에 중독됐다면 곧바로 증상이 나타났어야 한다. E씨의 증상이 3일 후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 이후에 음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앞서 쓰러진 할머니들의 연령대는 60~70대지만, E씨는 이 중 최고령인 80대다.
경찰은 E씨의 동선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는 병원 입원 당일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봉화군에서 시행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인근 재래시장 상가에서 다른 노인들과 화투를 친 다음에 은행에 들렀다. 자신의 통장에 들어있던 현금 일부를 인출하고, 수천만원이 든 통장을 손자에게 전달했다. 그 후 속이 좋지 않다며 병원을 찾았다가 쓰러져 안동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던 중 입원 12일 만인 7월30일 끝내 숨졌다. 이번 사건의 유일한 사망자다.
E씨의 위 세척액에서는 이전에 쓰러진 할머니들의 위에서 나온 농약 성분 외에 또 다른 살충제 2개와 살균제 1개 등 총 5개의 성분이 검출됐다. 앞선 피해자들보다 추가로 더 많은 농약을 마셨다는 것이 된다. 여러 정황상 E씨가 자신의 재산(통장)을 정리하고 스스로 농약을 마신 것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가족간 불화가 없었던 것으로 볼 때 사망 이유는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E씨가 사망하면서 더 이상 확인도 불가능하게 됐다.
다만 지금까지 경찰 수사에서 경로당 회원이 아닌 외부인이 경로당에 침입해 커피에 농약을 넣었다는 정황은 파악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범인은 경로당 내부를 잘 아는 사람이거나 회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E씨 사망과 관계없이 지금까지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고, 곧 수사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사건과 비슷한 일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공통점이 있었다. 사건 발생 장소가 마을회관 등 공용시설이고, 음식물이나 술, 커피, 음료 등에 농약을 탔으며 피해자와 가해자는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는 것. 또 이들 사이에는 다툼이 있거나 사이가 틀어지는 등 관계가 좋지 않았다.
마을 독극물 사건의 공통점
2015년 7월 경북 상주시 공성면의 한 마을회관에서 6명의 할머니가 냉장고에 든 사이다를 마시고 쓰러져 이 중 80대 2명이 사망했다. 사이다병에서는 맹독성 농약이 검출됐다. 경찰은 피해자들과 현장에 함께 있었지만 유일하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박아무개 할머니(82)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박씨 집 부근에서 뚜껑이 없는 박카스병이 발견됐는데, 농약 사이다병에 씌워져 있던 것이 박카스병 뚜껑이었다. 박씨 집에서는 사이다병에 들어있던 살충제의 원액이 나왔다. 동일한 성분의 살충제 병이 든 검은색 비닐봉지도 발견됐다. 박씨는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다음 해인 2016년 3월 경북 청송군 현동면의 한 마을에서 60대 주민 2명이 마을회관 김치냉장고에 보관해둔 소주를 나눠 마신 뒤 쓰러졌고, 이 중 한 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누군가 소주에 농약을 탄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서 70대 마을 주민을 용의자를 특정했다. 이들은 평소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용의자가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앞두고 자신의 축사 옆에서 극단 선택을 하면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
2018년 4월 포항에서는 고등어탕에 농약을 넣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공동 취사장에서 아침식사로 주민이 함께 먹을 고등어탕을 끓이고 있었는데, 이를 미리 맛본 주민 한 명이 구토 증상을 보였다. 고등어탕에는 농약이 들어있었다. 범인은 주민들과 갈등을 빚던 같은 마을 주민인 60대 남성이었다.
■비빔밥과 콩나물밥에 살충제 넣은 범인 못 잡았다
2012년 1월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의 한 마을 경로당에서 노인 6명이 비빔밥을 먹은 뒤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이 중 5명은 건강을 회복했으나 정아무개 할머니(72)가 이틀 후 사망한다. 사건 당시 주민들은 경로당에 있던 흰 밥에 각자 반찬을 가져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국과수에서 비빔밥 재료들을 조사해 보니 쌀밥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다. 독성이 강해 2012년부터 생산과 판매가 금지된 맹독성 농약이다.
경찰은 누군가 고의로 밥에 농약을 넣은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경로당 문이 항상 열려 있어 아무나 출입할 수 있었지만, 경로당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우선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지만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숨진 정씨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주민도 조사했지만, 사소한 말다툼을 했을 뿐 살인할 정도로 갈등이 크지 않았다. 당시 경로당에는 CCTV도 없었고, 의심을 살 만한 용의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수사는 제자리를 맴돌다 미제로 남았다.
약 1년 후인 2013년 2월 충북 보은군 보은읍의 한 식당에서 마을 주민 6명이 저녁식사를 했다. 이날 밥상에는 주메뉴인 콩나물밥에 반찬으로 멸치볶음, 나물무침, 식해 등이 나왔다. 이들은 식성에 따라 양념간장과 고추장 등을 넣어 콩나물밥을 비벼 먹었다. 한참 맛있게 먹던 이들은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둘 구토와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복통을 호소했고, 6명 모두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 이 중 한 명은 사건 발생 5일 만에 사망한다.
국과수 검사 결과 이들이 먹던 음식물에서 함평 사건과 동일한 살충제가 검출됐다. 경찰 수사 결과 콩나물과 쌀에 문제는 없었다. 콩나물밥을 먹기 위해서는 필수 재료가 양념간장인데, 유일하게 숨진 정씨의 경우 평소 음식을 짜게 먹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양념간장을 훨씬 많이 넣었던 것이다. 반면 양념간장을 가장 적게 넣은 김아무개씨는 금방 퇴원했다. 경찰은 누군가 양념간장에 살충제를 넣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용의자가 내부인인지 외부인인지가 좁혀지지 않았다. 식당 구조상 누군가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주방에 들러 양념간장에 살충제를 넣었을 수도 있었다. 아예 아무도 모르게 주방에 접근하거나, 외부인이 몰래 들어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결국 이 사건도 수많은 억측만 남긴 채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