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버려지거나 도축되거나…제2의 삶 허락되지 않는 경주퇴역마들
너무 늦은 관심…여전히 ‘활용도’에만 초점 맞춰진 ‘말 복지’

종마가 암말과 교미하기 전 암말을 달래고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시정마(왼쪽). ⓒAnne M. Eberhardt
종마가 암말과 교미하기 전 암말을 달래고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시정마(왼쪽). ⓒAnne M. Eberhardt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 중에 벌어진 ‘까미’ 사건은 경주마들의 은퇴 후 삶이 어떤지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게 된 전환점이었다. 그마저도 아주 드물게 벌어진 불행 중 하나였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주퇴역마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제도가 없다는 사실보다 더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불과 4~5년에 그치는 짧디짧은 현역기간이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며 전국에 승마장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고급 시설을 갖춘 일부 승마장에서는 경주퇴역마가 아니라 유럽산 승용마를 보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10년이 지나도 똑같이 반복된다. 경주퇴역마들은 질주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경주퇴역마들은 초보자들이 타기엔 안전하지 못하고, 고급 승마술을 배우길 원하거나 시합 출전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에게는 능력치가 부족하다고 평가된다. 활용범위가 굉장히 좁은 셈이다. 오로지 빠르게 달리는 데만 집중해 번식을 거듭한 탓이다. 그러다보니 까미처럼 촬영장에서 비명횡사하거나 도축돼 식용으로 불법 유통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승용마로 용도 변 경됐다고 발표되는 수치도 도축되기 전에 일시적으로 바꿔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의견이 대세인데, 우리나라에는 그만한 승용마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퇴역 후 고려할 수 있는 조금 특이한 진로로 ‘시정마(始情馬)’가 있다. 시정마의 역할은 종마가 안전하게 교미할 수 있도록 앞서 암말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몸값 비싼 종마가 합방을 시도하다 예민해져 있는 암말에게 맞아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사전작업이 이루어진다. 말 생산목장에서 능력 있는 시정마는 꼭 필요한 존재로 대접을 받지만 성욕이 없거나 암말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면 시정마가 될 수 없다. 애초에 수말만 가능하다는 한계도 있다. 그밖에 경주퇴역마를 혁신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볼만한 사례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대안이 없다.

경주퇴역마 '진주'는 사람이 타려고 시늉만 해도 화를 내고 거부할 정도로 퇴역 후 트라우마가 심각했다.(ⓒ허드앤허트
경주퇴역마 '진주'는 사람이 타려고 시늉만 해도 화를 내고 거부할 정도로 퇴역 후 트라우마가 심각했다.(ⓒ허드앤허트

도축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퇴역마들

경주마였던 ‘진주’는 부상과 수술, 다시 경마에 투입되길 반복하며 사람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로 은퇴했다. 원래 진주를 생산했던 목장에서 시정마로 쓰기 위해 다시 데려갔는데, 진주는 그 일에 소질이 없었다. 그렇게 진주는 용도미정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진주의 생산자가 말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는지 도축장 대신 소위 ‘문제말’들을 재교육해준다는 트레이너에게 보내면서 진주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게 됐다. 하지만 사람이 타는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겨버려 처음에는 안장 밑에 까는 패드를 보거나 사람이 근처에만 와도 발광이었다고 한다. 잦은 수술의 후유증으로 골반도 틀어진 상태다. 퇴역 1년, 이제는 기승 준비 중에도 가만히 서서 기다릴 만큼 안정을 찾았지만 다시 사람을 태우고 달리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진주처럼 보살핌을 받고 제2의 삶을 준비할 기회를 얻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다. 대부분이 도축장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국내 경마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마사회는 말이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퇴역마를 어떻게 처분할지는 마주 권한이라는 입장을 끈질기게 고수했다.

이제는 안장을 얹고 기승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진주'. ⓒ허드앤허트
이제는 안장을 얹고 기승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진주'. ⓒ허드앤허트

“한국에 경주마 수출 않겠다”

그러던 2019년, 미국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에서 잔혹하게 도축되는 한국 경주 퇴역마 현실을 고발하면서 우리나라에 경주마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국제적 비난을 샀다. 올해 초 마사회는 경주퇴역마 복지기금을 확대하는 등 이전보다 말 복지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퇴역마를 대상으로 한 승용마 품평회를 개최하고, 승마대회에서 말 출전자격을 경주퇴역마에 한정하는 식으로 재훈련을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오직 경주를 위해 말을 개량하는 생산 방식에 변화가 없는 한, 퇴역마 ‘활용’에만 초점을 맞추는 방식은 미봉책에 그칠 것 같아 우려스럽다. 모든 문제는 ‘좋은 말’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경주용 말을 생산하는 것에서부터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마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어느덧 100년 역사다. 그에 비해 경주마 복지와 은퇴 후 삶에 대한 관심은 너무 늦게 시작됐다. 경마는 결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경주퇴역마는 여전히 매년 쏟아져 나올 것이다. 식용으로 키워지는 가축에 대해서도 복지가 논의되는 시대에, 사람과 교감을 하고 사람 뜻에 따라 교육이 되는 ‘말’이란 동물을 대하는 인식 또한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