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경주마‧승용마의 삶
승마 인구 4만…반려마 향한 책임감 함께 배워야
‘말'이란 동물이 우리나라에서 큰 논란이 됐던 적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말 뇌물’ 사건이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승마선수로 활동하며 삼성그룹으로부터 수억원을 호가하는 말을 지원받았다.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금액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승마는 돈 많고 빽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스포츠라 낙인찍혔다. 이 시기 승마에 대한 사람들 인식은 최악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난해 KBS드라마 <이방원> 촬영에 동원됐다가 말이 폐사한 사건이다. 경주 퇴역마였던 ‘까미’는 이날 촬영을 위해 다리에 와이어를 묶고 달렸다. 촬영 스태프는 까미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을 때 와이어를 잡아 당겨 무리하게 낙마 장면을 연출했다. 까미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넘어지며 목이 꺾인 채 땅에 고꾸라졌고, 며칠 후 불과 여섯 해밖에 되지 않았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동물 목숨마저 소품처럼 다룬다며 한 목소리로 방송계를 비난했다.
경주마 활동 5년 안팎, 절반 이상이 방치 및 폐기
승마에는 귀족 스포츠란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닌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좋은 말’의 가격, 비싼 기승료는 대체 말이 얼마나 대단하신 몸이기에 싶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말들이 보내는 일생은 전혀 귀족스럽지 않다. 특히 까미 사건은 경주퇴역마가 은퇴한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됐다. 그걸로 까미는 하늘에서나마 조금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말 산업은 경마가 약 80%를 차지하는 기형적인 구조다. 그런데 보통 말들이 경주마로 활동하는 기간은 길어야 4~6년이다. 성적이 좋지 않거나 부상이 심하면 그보다 더 일찍 퇴출되기도 한다. 일부 아주 우수한 성적을 내는 말들은 씨수마로 대우 받지만 대부분 은퇴 후 삶은 그다지 팔자가 좋지 못하다. 일반 승마장에서 제2의 마생(馬生)을 시작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게 ‘재취업’에 성공하는 비율은 30~40%밖에 되지 않는다. 매년 경마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1500여 마리의 퇴역마 중 60%가 ‘용도미정’ 판정을 받고 방치되거나 폐사 처리된다.
이렇게 현실과 이상이 다른 이유는 분명하다. 생활스포츠로서 승마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즐기는 문화가 아직 우리나라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할 인력과 기반시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인식이 턱없이 미숙하다.
경주마로 살던 말이 승용마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어린 나이에 앞만 보고 달리는 법만 배운 말에게 사람의 신호에 따라 걷고, 달리고, 멈출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퇴역하고 대부도의 한 승마장으로 간 ‘롬멜’은 평보(말의 걸음걸이 중 가장 속도가 느린 것으로 한 번에 한 다리씩 앞으로 내딛는 것)를 배우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여전히 롬멜은 질주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지만, 이제는 평보도 잘하고 사람의 신호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며 달릴 줄 아는 어엿한 승용마다.
말을 재훈련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격렬한 경주에 투입되는 말들은 몸과 마음에 병을 얻는 일이 많다. 경주 퇴역마 ‘진주’는 몇 달 전까지 현역 생활을 하다 용도미정 판정을 받았다. 한창 경마를 뛰던 시절 반복적인 수술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진주는 아직 사람에 대해 심한 경계심과 거부감을 보인다. 다행히 진주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조련사를 만나 폐사될 위기를 넘기고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경마를 위해 육성됐다가 퇴출되는 말 수에 비해 이들이 충분히 회복한 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환경은 너무나 부족하다.
말과 인간의 공존, 행복한 승용마의 조건
승용마로서 삶도 결코 좋기만 한 팔자는 아니다. 말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량, 가끔은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는 방마(放馬) 공간, 말 능력과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춘 훈련 혹은 치료를 해줄 수 있는 조련사가 있어야 한다. 승마란 말이 인간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인간이 오래 건강하게 공존하기 위한 것이라는 승마인들의 인식도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승마장이 더 많다. 행복하지 않은 말들은 점차 ‘사람 지시를 따르지 않는 말’, ‘난폭한 말’이 돼간다. 그렇게 한번 망가지기 시작하면 승마장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결국은 폐사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촬영장에서 말이 사고를 당하는 일 또한 드문 일은 아니라고 한다. 이번 ‘까미’ 사건이 특별히 문제가 더 많았다기보다 그동안은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이렇게 논란이 된 것이 업계에서는 그저 운이 나빴다는 반응이라지만, 동물복지에 대한 우리나라 인식이 조금은 높아진 반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수많은 말들이 사람에 의해 태어나고 또 사람에 의해 버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말들을 거두고 새 삶을 알려주는 사람들 또한 있다. 마음을 닫아버린 동물도 사랑과 이해를 받으면 조금씩 변화한다는 것을 많은 사례들이 증명한다. 말은 한번 사람을 믿고 따르기 시작하면 그 어떤 반려동물보다 큰 안정감과 유대감을 선사하는 놀라운 동물이다. 정기적으로 승마를 즐기는 인구가 4만이 넘은 지금, 사람들의 책임감 있는 노력으로 말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