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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경보벨 고장 난 민주당, 비판에 귀 닫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소신도, 쓴소리도 사라진 민주당 소장파
총선 직후 70%대를 찍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진즉에 데드크로스를 지나 하락을 계속하고 있고, 민주당의 지지율은 미래통합당과 박빙의 다툼을 벌이고 있는 여론조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통합당 또한 제1 야당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만약 통합당이 제대로만 했다면 벌써 두 정당 간의 지지율은 역전됐을 것으로 보인다. 빙산 앞에서 타이타닉호가 그랬듯이 민주당 안에서도 경고 메시지는 공유되지 못하고 있고, 멈출 줄 모르는 일방통행의 질주만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민주당을 지지했던 민심이 세 달 만에 돌아선 것은 ‘176석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풀이했지만, 열린우리당(민주당의 전신) 시절에도 볼 수 없었던 역대급 질주가 계속되었다. 민주당이 선택한 법안들은 상임위원회 심의 과정조차 건너뛰고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은 채 2~3일 만에 통과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1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 ‘협치’를 다짐한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생겨난 일들이다. 광역단체장들의 잇따른 성추행 사건을 비롯해 총선 이후 정치권에서 터져 나온 많은 사고의 대부분은 민주당에서 생겨났다. 176석을 차지하니 오만해져서 자신들이 가진 힘을 주체할 줄 모른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정당사에서 이럴 때 경보음을 울리고 나섰던 것은 주로 초선이나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민심이 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고비 때면 앞장서서 자성과 변화를 촉구하는 내부 고발자 역할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민주당에서는 민심이 떠나가도 그런 초선-소장파 의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금태섭’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평소 당내에서 소신에 따라 쓴소리를 하던 금태섭 전 의원의 공천 탈락은 당의 분위기를 거스르는 의원에게 어떤 대가가 치러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경선에서 패배한 것이기에 자신의 책임이라고는 하지만, 조국 전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비판적인 질문을 했던 일, 공수처 설치 법안에 당론과 달리 기권표를 행사했던 일 등으로 그는 ‘친문(親文)’ 당원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터였다. 더구나 민주당 윤리심판원은 공천도 받지 못한 그에게 징계를 내리는 이중 형벌을 내린 상태다. 정치를 계속할 꿈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함부로 나서면 후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이른바 ‘금태섭 효과’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침묵의 카르텔은 한층 견고해졌다. 과거 당내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누렸던 그 민주당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하나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당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초선-소장파의 구성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정치에 물들지 않았기에 민심을 우선하는 소신의 목소리들을 많이 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민주당 공천에서는 ‘친문’ 인증을 받은 인물들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해 왔다. 특히 21대 총선에서는 ‘조국 수호’ 대열에 몸담았던 인물들이 다수 공천을 받았다. 이들은 지금의 민주당에 굳이 반성해야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힘을 앞세워 어떻게든 윤석열 검찰총장을 물러나게 하고 검찰을 장악하는 것이 민심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자성의 목소리는 고사하고 거친 말들이 쏟아진다. 민심 수습의 역할은 고사하고, 불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여당 자신이 민심 떠나게 만드는 주인공 돼
민심이 집권세력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 민심과 청와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여당이다. 그런데 요즘 민주당의 모습을 보노라면 여당 자신이 더 문제아가 되어 버린 듯하다. 고 박원순 전 시장 장례 기간에 피해 여성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당 대표가 “XX 자식” 소리를 했던 것이 민주당이었고, 물난리가 난 화면을 뒤로하고 파안대소하던 사진 속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민주당 의원들이었다. 이렇게 여당 자신이 민심을 떠나게 만드는 주인공이 되고 있으니, 민심의 가교 역할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무색해진다. 과거에는 민주당이 이러지 않았다. 그래도 균형의 미덕을 아는 정당이 되려고 노력했고, 민심을 무서워하는 정당이기도 했다. 하지만 4·15 총선 이후로 우리가 보고 있는 민주당의 모습은 민심에 대한 둔감함 그 자체다. 전체 국민이 아니라 오로지 열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가 초래한 재앙이다. 카라바조의 작품 《나르시시즘》에서 나르시스는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너무도 사랑하다가 결국 자신을 찬미하면서 호수에 빠져 죽는다. 그런 종류의 ‘자기애’는 저주이며 그 극단적인 형태는 결국 자기파멸이 된다는 점을 그림은 보여준다. 에리히 프롬은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스스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우월감에 빠진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4·15 총선 이후 자신만이 정의라고 믿은 민주당은 지지자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열고, 비판하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아버리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말았다. 쓴소리를 듣기 싫어도 경청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바라보며 국정을 운영하는 태도다. 집권세력이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너무도 사랑하다가 스스로 호수에 빠져버린다면 나라의 불행이 되고 만다. 민심이 떠나가는데도 이름을 걸고 이를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도 경보벨을 누르는 사람 하나 없으니, 이야말로 진짜 위기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