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전망대] “서독 미·영·불·소 4대 강국 외교전술에서 통일 해법 찾아라!”
북한 비핵화의 해법을 둘러싸고 북·미·중 간 치열한 수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도 숟가락을 얹을 틈을 엿보고 있다. 어느 국가도 그 과정과 결과로 인해 자국의 안보가 불리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핵 폐기 과정에서 오고 갈 경제적인 측면도 관심사다. 주변국을 어떻게 만족시키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해야 할까.
‘통일’이라는 사상 초유의 목적을 향해 서독 정부가 추구한 노력의 시작점은 미·영·불(프랑스)·소 전승 4국의 이해관계였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 붕괴, 1990년 3월18일 동독 자유총선거를 통해 신속한 통일에 대한 내부 합의가 만들어졌다. 서독 정부는 통일을 구체적으로 엮어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전승 4개국 간에 통일독일의 군사안보 문제에 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통독 당시 서독 정부는 독일의 통일이 군사안보적 측면에서 전승 4개국 어디에도 불리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나토 가입·경제지원, 미·소 지원 이끌어내
당시 서독에서 이루어진 통일독일의 군사안보적 위상에 관한 논의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통일독일이 서방의 군사동맹체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하되 동독 지역에 나토군이 주둔하지 않는 방안, 둘째, 통일독일이 나토의 회원국이 되는 것은 물론 동독 지역에도 나토군이 주둔하는 방안, 셋째, 나토와 동구 사회주의권 군사동맹체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현 유럽안보협력기구: OSCE)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동서 간 실제적인 군축조치를 포함하는 하나의 새로운 전 유럽 안보체제를 형성하는 방안이었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은 첫째 방안, 즉 통일독일이 나토에 가입하되 나토의 군대는 동독 지역에 주둔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통일독일이 나토 회원국이 됨으로써 미국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동유럽으로 나토 영역의 확충을 반대함으로써 소련의 군사안보적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를 동시에 만족시키고자 했던 이 안이 서독 정부의 기본 골격이 됐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의 통일과 군사안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국제협상의 틀로서 1990년 5월5일 시작된 ‘2+4협상’에서 서독은 통일독일이 나토의 중심국으로 확고하게 남을 것이고, 동독 지역의 외국군 주둔 금지에 따라 나토군이 주둔하지 않는 대신 소련군도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독일 통합을 유럽 통합과 연계해 추진할 것도 명확히 밝혔다. 이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서유럽 통합의 움직임으로부터 통일된 독일의 이탈, 독일의 통일로 ‘제4독일제국’의 부상 가능성, 통일된 독일에 의해 지배되는 유럽을 우려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전략이었다.
소련은 그러나 이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서독 안을 받아들이되 통일독일의 나토 가입을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내부 보수층의 명분을 없앨 수 있도록 국제적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통일독일의 나토 가입에 대한 동의가 바로 자신에 대한 내부 쿠데타의 빌미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아울러 고르바초프는 통일독일의 나토 가입에 대한 반대급부로 서독과 미국 등 서방 선진국으로부터 경제지원과 같은 양보를 최대한 받아내고자 했다.
서독은 미국과 함께 소련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나토 회원국으로부터 숨 가쁘게 이끌어냈다. 우선 1990년 6월 나토 외무장관회의에서 동서 간 긴장완화와 상호협력을 천명하는 성명서가 발표됐다. 또한 1990년 7월2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제28차 소련공산당대회가 개최돼 내부적으로 새로운 유럽에 관한 심각한 논쟁이 진행 중이던 7월5~6일 런던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서는 더욱 구체적이고도 중요한 조치가 취해졌다. 16개국 정상은 “나토가 소련을 더 이상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평화선언을 채택했다. 또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방은 군사적 무력을 먼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23개 원칙도 발표했다.
‘런던 성명’을 통해 유럽에서의 군사적 대결체제 종식을 이끌어낸 서독은 소련의 경제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가시적인 조치를 취했다. 우선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향후 12년 동안 아무런 부대조건 없이 30억 달러(3조3600억원)의 차관 제공을 결정했다. 아울러 런던 회의 직후 7월9일 미국 휴스턴에서 개최된 선진서방7개국(G7) 정상회담에서는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에 대한 대규모 경제 원조를 주장했다.
국제적으로 소련의 정치·군사안보 및 경제적인 요구에 부응한 서독은 1990년 7월15~16일 콜 총리와 고르바초프 서기장 간 코카서스 회동에서 최종 합의안을 만들어냈다. 독일은 통일 후 방어 위주의 비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병력 37만 명의 군사 소국화 정책을 추진할 것이며, 동독 지역 내 외국군의 주둔 및 서방측의 핵무기 및 생화학무기 배치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동독 주둔 소련군은 1994년까지 철군하되 철수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서독이 부담하겠다고 합의했다. 그 반대급부로 독일은 통일 이후에 완전한 주권을 가짐과 동시에 전승 4개국의 권한은 소멸되며 독일이 자신의 군사동맹체 귀속 여부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독일통일에 관한 정치·군사안보적 문제가 해결됐고 1990년 9월12일 ‘2+4협상’에 참가했던 6개국 외무장관은 ‘독일에 관한 최종규정에 관한 협정’, 이른바 ‘2+4협정’에 서명했다. 전승 4개국이 갖고 있던 ‘독일 통일에 관한 유보권’(Vorbehaltsrecht)은 1990년 10월3일 독일 통일과 함께 소멸됐다.
서독, 전승 4개국 이해관계 적절히 안배
물론 독일의 통일과 북한 비핵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타래처럼 엉킨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목표를 쟁취해 나간 서독의 외교는 지금 우리에게 연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한목소리를 이끌어냈던 서독의 대미 관계와 현재의 한·미 관계, 통일독일의 나토 잔류와 향후 한·미 동맹, 유럽에서의 평화선언과 한반도 종전선언은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다. 또한 ‘2+4협상’과 북한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을 대치하는 새로운 협상 틀, 소련을 설득하기 위한 서방의 대소 경제지원과 향후 대북 경제지원, 유럽 통합 속의 독일 통일과 동북아 지역 통합 속의 한반도 통일 등도 연구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30년 전에 펼쳐졌던 역사상 가장 빛났던 서독의 통일외교가 북한 비핵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외교에 창조적으로 응용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