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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전망대] 동독, ‘맹주’ 소련 지원 끊기자 곧장 경제난
동독 혁명, 먹고 사는 문제로 촉발…北도 반면교사 삼아야
동독, 극심한 경제난에 내부 불만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1980년대 들어 공급 부족으로 눈에 띄게 나타났다. 1971년 호네커가 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후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일체화’를 구호로 내세웠지만, 동독 공산당은 주민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정책을 우선시했다. 그 부담이 누적돼 나타난 결과였지만, 사실 그것이 동독 사회주의였다. 주택 건설에서부터 생필품 및 공공 교통수단에 대한 국가 보조, 생산성이 없음에도 노동권을 보장해 주기 위한 고용, 이를 위한 재정 지원 등이 망라됐다. 문제는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동독의 경제였다. 동독의 노동생산성은 서독의 30%도 되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소련에 밀어닥친 경제난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련은 동맹국들에 대한 유류 공급을 줄였고 원유 가격도 세계시장 가격으로 높이는 동시에 차관에 대한 이자도 높였다. 이로 인해 동독은 만성적인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그나마 서독이 준 19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으로 간신히 견딜 수 있었다. 해외채무도 급증해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대두됐다. 서방의 채권기관에 의해 동독 사회주의경제의 문제점이 낱낱이 해부당하는 것을 동독 지도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피하고자 했다. 당시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은 1989년 10월말 동독의 경제상황을 분석하면서 동독이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면 생활수준의 25~30%가 떨어질 것이고, 동독은 더 이상 통치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서방으로의 혈액 판매, 서독으로부터 쓰레기 수입, 동독 내 면세상점을 통한 주민 보유 외화의 확보, 동독 정치범들을 대가를 받고 서독에 넘겨주는 석방거래(Freikauf)의 증가 등 외화를 긴급히 확보하기 위한 동독 지도부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동독은 비용이 얼마나 들건 간에 상품을 생산해 서방 수출로 외화를 확보하고자 했다. ‘채산성보다 유동성 우선’은 악순환의 고리로 이끌었다. 투자가 소홀히 되고 자본금은 잠식됐다. 생산시설, 철도와 도로 교통은 현저하게 낙후되고 건축재는 결여됐다. 통신망은 거의 전쟁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됐고, 어디서나 갈탄 사용으로 인해 매연 냄새가 났다. 경제혁신은 이뤄지지 못했고, 중공업과 농업 종사자들이 과도하게 많았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동독 지도부는 마이크로전자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사업으로 추진했지만, 질주하는 서방의 기술과 산업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대한 국가적 투자는 엄청나게 손해를 보았고 구조적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동독 경제는 그 어느 시기보다 세계시장의 상품이나 경제적, 기술적 지식과 정보의 수준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유세계 홍보 서독 정책 대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