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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전망대] 동독, ‘맹주’ 소련 지원 끊기자 곧장 경제난
동독 혁명, 먹고 사는 문제로 촉발…北도 반면교사 삼아야

1989년 동독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공산당 독재체제를 종식시키고 통일이라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평화적 혁명은 어떻게 시작됐고 시사점은 무엇일까. “에리히, 내가 너에게 솔직히 말하는데 절대 잊지 말아야 해. 우리 없이, 소련 없이 동독은 권력도 힘도 존재할 수 없어. 우리 없이는 동독 자체가 없는 거야.”  1970년 7월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에리히 호네커가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기 전에 그에게 한 이 말은 소련과 동독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1985년 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개혁공산주의를 표방했다. 핵심은 경제난 극복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지배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소련 자체도 해체를 앞두고 있었다. 동구 공산권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고르바초프가 철회함에 따라 동독 공산당의 동독 통치에 대한 보증도 확약될 수 없었다. 소련의 변화가 동독을 무너지게 한 것은 아니나, 외부변수로서 동독 내 혁명의 문을 연 것만은 분명하다. 동독 혁명의 두 번째 원인은 1989년 폭발한 반체제운동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경직된 동독의 지도부도 한몫했다. 문제는 이 문제가 동독 체제에 구조적으로 내재돼 있었다는 점이다.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그럭저럭 제어될 수 있었던 문제들이 소련의 경제난, 위상 약화라는 새로운 상황 아래서 치명적으로 드러났다. 
수천 명의 동독 사람들이 1989년 11월12일 독일 베를린의 베르나우어 거리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하고 있다. ⓒ dpa 연합
수천 명의 동독 사람들이 1989년 11월12일 독일 베를린의 베르나우어 거리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하고 있다. ⓒ dpa 연합

동독, 극심한 경제난에 내부 불만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1980년대 들어 공급 부족으로 눈에 띄게 나타났다. 1971년 호네커가 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후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일체화’를 구호로 내세웠지만, 동독 공산당은 주민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정책을 우선시했다. 그 부담이 누적돼 나타난 결과였지만, 사실 그것이 동독 사회주의였다. 주택 건설에서부터 생필품 및 공공 교통수단에 대한 국가 보조, 생산성이 없음에도 노동권을 보장해 주기 위한 고용, 이를 위한 재정 지원 등이 망라됐다. 문제는 재정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동독의 경제였다. 동독의 노동생산성은 서독의 30%도 되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소련에 밀어닥친 경제난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련은 동맹국들에 대한 유류 공급을 줄였고 원유 가격도 세계시장 가격으로 높이는 동시에 차관에 대한 이자도 높였다. 이로 인해 동독은 만성적인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그나마 서독이 준 19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으로 간신히 견딜 수 있었다.  해외채무도 급증해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대두됐다. 서방의 채권기관에 의해 동독 사회주의경제의 문제점이 낱낱이 해부당하는 것을 동독 지도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피하고자 했다. 당시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은 1989년 10월말 동독의 경제상황을 분석하면서 동독이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면 생활수준의 25~30%가 떨어질 것이고, 동독은 더 이상 통치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서방으로의 혈액 판매, 서독으로부터 쓰레기 수입, 동독 내 면세상점을 통한 주민 보유 외화의 확보, 동독 정치범들을 대가를 받고 서독에 넘겨주는 석방거래(Freikauf)의 증가 등 외화를 긴급히 확보하기 위한 동독 지도부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동독은 비용이 얼마나 들건 간에 상품을 생산해 서방 수출로 외화를 확보하고자 했다. ‘채산성보다 유동성 우선’은 악순환의 고리로 이끌었다. 투자가 소홀히 되고 자본금은 잠식됐다. 생산시설, 철도와 도로 교통은 현저하게 낙후되고 건축재는 결여됐다. 통신망은 거의 전쟁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됐고, 어디서나 갈탄 사용으로 인해 매연 냄새가 났다. 경제혁신은 이뤄지지 못했고, 중공업과 농업 종사자들이 과도하게 많았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동독 지도부는 마이크로전자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사업으로 추진했지만, 질주하는 서방의 기술과 산업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대한 국가적 투자는 엄청나게 손해를 보았고 구조적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동독 경제는 그 어느 시기보다 세계시장의 상품이나 경제적, 기술적 지식과 정보의 수준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유세계 홍보 서독 정책 대성공

이러한 가운데 서독의 존재는 더욱 빛을 발했다. 동독 주민들에게 비교의 대상은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이 아니었다. 1980년대 말 강력한 경제 성장을 구가했던,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잘사는 서독이 동독 주민들의 가슴에 깊숙이 다가갔다. 텔레비전의 영향이 컸지만, 서독이 접촉과 교류를 통해 동독 주민들의 눈과 귀를 연 것이다. 서독의 생활상이 동독 내에 넓고 깊게 인식됐고, 동독 정부의 대서독 차단 정책은 효력을 가질 수 없었다. 동독을 떠나려는 이주 신청은 1980년 2만1500명에서 8년 뒤 11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주를 조금이라도 허가해 불만을 줄이려는 당국의 기대와는 달리 허가할수록 신청자 수는 증가했다. 동독 공산당의 지배에 대한 정당성은 단 한 번도 ‘자유선거’에 의해 검증된 적이 없었다. 동독 공산당은 언제 어느 때나 정당하다고 세뇌됐다. 반대나 이견은 용납되지 않았다. “다르게 생각하는 자가 바로 적이다”(Feind ist, wer anders denkt)를 구호로 내건 국가보안성 슈타지는 이를 구축하는 데 골몰했다.   동독은 억압과 더불어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당근도 내세웠다. 체제 충성자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기회, 생필품 공급 등을 챙겨줬다. 물품 공급은 더욱 왜곡됐다. 결국 동독 공산당, 동독이란 국가 자체의 정통성 문제가 전면에 부각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9년 5월7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동독 정부는 확실한 성과가 간절했다. 선거는 여느 때처럼 조작됐다. 통상 99%의 지지로 발표되었던 예전과는 달리 98.85%의 지지가 공식 발표였다. 비밀투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반대는 10~20%에 달했으리라 추측된다. 반체제운동의 횃불이 이제 어느 때보다 새롭고 넓게 타올랐다.     지난 1년 동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4차례나 중국을 방문했고, 김정일 위원장 역시 서거 전 불편한 몸으로 1년 새 3차례 방문했었다. 목적은 정치적, 경제적 지원 요청일 것이다. 중국의 지원은 북한 정권의 안정과 경제난 극복을 위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인민의 이익을 최우선 절대시하고 인민의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인민을 위해 멸사봉공하고 인민 생활에 첫째가는 관심’을 돌리고자 한다면 ‘충분조건’ 역시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 바로 북한 내 구조적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과 그에 기초한 정책의 변화다. 혁명의 시기 동독과 현재 북한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문제의 유사성을 직시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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