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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결혼과 공동육아 그리고 페미니즘

내 친구들은 대부분 60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만나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자녀 혼사와 관련된 것이다. 다들 남의 자식 혼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는 않을 정도로 교양들이 있다 보니, 결국 자기 자식 이야기로 빠진다. 이미 자식들을 혼인시킨 친구들은 왠지 승리한 것 같고, 비혼 자녀를 둔 엄마들은 괜히 초조하다. 그런데 아들 가진 엄마와 딸 가진 엄마 사이에 미묘한 관점의 차이가 있고, 그것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 달라지는 것을 문득 발견한다.  한 친구가 말하기를, 지금 내 소원은 아들이 장가 좀 가는 거란다. 어디 참한 처자가 나타나 아들놈 사람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단다. 다른 친구가 핀잔을 준다. “왜? 아직도 아들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를 니가 다 하니? 지한테 하라 그래!” 당연히 변명이 따라온다. “아니, 나가 살잖아. 근데 남자라서 누가 안 챙겨주면 살림이 안 야물어서….” “얘가 멀쩡한 아들내미 등신 만들고 있네. 지 살림 지가 못 하면 그게 등신이지.” 또 다른 친구가 거든다. “왜 남의 집 멀쩡한 처자를 니 아들 시중받이로 들이겠다고 그래? 니 아들 괜찮은 줄 알지만 시어미 자리가 사고방식이 이러면 내 딸이면 니 며느리 가겠다면 말린다.”  아들 장가 좀 보내달라고 하소연하다가 뼈도 못 추린 셈이다.  딸의 엄마가 하는 말은 결이 또 다르다. “시집보내기 싫다. 혼자 살면 좋겠어”라고 한 친구가 말하자, 뜻밖에도 호응의 물결이 인다. 방금 아들 장가 좀 보내달라고 하던 친구까지도 “지 밥벌이만 할 수 있으면 혼자 살아도 되지”라고 한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성 차별하는 사회를 성토하다가 “내가 그때 지금만큼만 뭘 알았더라면…”으로 이어진다. ‘뭘’이란 당연히 페미니즘적 인식이니, 그 ‘뭘’ 조금만 알았더라도 지금 영감탱이하고는 안 살았지. 그 시집살이 안 했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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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빨리 국가 차원에서 공동육아 해야”

이 또래,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있는 여성들의 의식이 젊은 페미니스트 여성들과 같을 수는 물론 없지만, 아들 가진 엄마가 페미니즘에 눈뜰 때 생겨나는 곤혹스러운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가 유머러스하게 우리를 웃긴다. “며느리가 말이야, 영감탱이한테 ‘아버님, 어머님을 그렇게 ‘개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하는 거야. 기도 안 찬데 시원하더라고.” “나는 내 아들이 집에 와서 설거지하는 거 참 좋아. 남편 좀 보라고.” 한 친구가 다시 말한다. “그래서 니 아들 장가가서 손주 낳으면 니가 봐주나?” “며느리가 일하느라 못 보는 거니까 장모가 봐줘야지.” “요새는 시아버지 자리가 육아담당이야, 모르나?” 그러자 누가 말한다. “황혼이혼이라는 거를 할라 했더니 이혼하면 안 되겠네.” 폭소가 터진다. 언제나 이런 문제의 해결사인 내가 나선다. “청와대에 청원 넣어라. 하루빨리 국가 차원에서 공동육아 하라고.”  이 따뜻하지만 무질서한 할머니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네 살배기 아이를 때리고 화장실에 방치해 죽게 만든 어미를 만일 이들이 이야기한다면 뭐라고 할까? 궁금해서 단톡방에서 물었다. 한참 동안 그 어미를 성토하고 애비를 소환하던 끝에 친구들은 결론을 내렸다. 정말로 공동청원 넣자. 어느 집에 태어나더라도 애들은 다 함께 돌봐야지. 그 에미도 누가 진작 어릴 적부터 보살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할머니 페미니스트들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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