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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피해자’가 아닌 ‘고발자’ 장자연을 기리며

도발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가 세상을 뜨셨을 때 어떤 분이 김복동을 선생님이라 부르면 안 될까라는 말을 툭 던졌다. 존경할 궤적을 남긴 어른을 부르는 이름이 선생님이다. 김구 선생님, 김대중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 그 밖에도 우리가 누구를 선생님이라 부를 때의 그 각별한 느낌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할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라 불러보자.  ‘할머니’라는 호칭이 정답고 좋지 않은가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선생님’이라 부르려는 뜻에는 ‘소녀’에서 ‘할머니’로 건너뛰며 사라져버린 인간 김복동의 투쟁의 역사와 그가 회복하고 싶었던 가치들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음을 다들 절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칭 하나가 바뀌어도 그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선명해지는 경험에 또 하나를 보태고 싶다. 다시 도발적인 제안을 해 보자. 고 장자연을 ‘열사’라 부르면 안 될까?
한창 성장하던 장자연이란 배우의 죽음은 그를 ‘피해자’에서 ‘고발자’로 바꾸었다. ⓒ 연합뉴스
한창 성장하던 장자연이란 배우의 죽음은 그를 ‘피해자’에서 ‘고발자’로 바꾸었다. ⓒ 연합뉴스

‘호칭’이 바뀌면 의미도 바뀐다

세상의 부조리와 악행을 고발하며 목숨을 던진, 또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죽음을 이어받아 세상을 바꿀 일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의지를 다지고 의미를 분명히 하고자 그들을 열사라 부른다. 수많은 민주열사가 있었고 수많은 노동열사가 있었다. 장자연은 그렇다면 어떤 죽은 자일까. 그는 연예인 여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성폭력 현실을 드러냈고, 우리 사회의 소위 지배 커넥션이 돈과 성을 매개로 어떤 더러운 담합을 하고 있는지를 드러냈고, 그것을 백일하에 제대로 드러내 처벌하고 해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또한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어쩌면 장자연은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자신의 경력 전부를 거는 자살 아니고는 이 문제를 제대로 외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설 전에 고 장자연을 다룬 기사에서 흔한 댓글을 보았다. “여성단체와 시민단체는 뭐 하고 있길래 아직도….”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상투적인 발언이었다. 장자연 사건이 품은 의미는 이런 태도 앞에서 한정된다. 한 여배우가 죽음으로 고발한 성폭력 권하는 사회의 책임은 남성인 나와는 무관하고, 그 일은 여성들만이 관심을 가질 일이어야 한다. 동시에 관심을 안 가지는 여성들은 비난당해도 괜찮은데 내 일은 아니다. 겹치고 겹치는 책임회피와 무관심이 가끔 가다가 저런 댓글을 다는 일로 면피까지 한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장자연은 누구일까? 장자연 사건을 아직도 ‘성상납’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본다. 정확히 하자. 장자연은 고 김복동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여성이지 상납당하거나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었다. 죽음을 이기고 죽음보다 더한 세상의 눈길을 이기고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발한 분들이 앞섰다. 고 장자연이 자신이 당한 일들을 기록해 고발하고 그 고발의 진실을 목숨으로 증거함으로써 뒤섰다. 그리고 여성단체는 장자연의 일을 말하고 따지고 파헤치고 고발하는 일을 십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저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부끄럼도 없이 살고 있다면, 장자연의 목숨을 걸고 한 고발이 세상에 남긴 건 뭘까. 의미를 강화하자. 열사라 부르자.  김용균 열사의 죽음이 수많은 위험한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그러했듯, 장자연의 죽음도 그를 단순한 피해자에서 죽음을 무릅쓴 고발자로 바꾸었다. 열사라는 이름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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