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국제 분야] 文 대통령·金 위원장·트럼프 대통령, ‘화해의 만남’ ‘세기의 회담’ 주역
2018년 한반도 정세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희망’이다. 불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평화’라는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유대인이 즐겨 읽는 지혜서 《탈무드》엔 이런 말이 있다.
“울어도 눈물 나고 크게 웃어도 눈물 난다.”
기왕 흘릴 눈물이라면 웃다가 흘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동양문화권의 경우, 하루의 개념을 새벽에서 시작해 늦은 밤으로 보는 것과 달리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 시작된다. 안식일인 샤바트(Sabbath)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다. 그런 점에서 절망을 극복하는 힘은 유대인 생존의 원동력이다.
한반도에 봄이 찾아온 걸까. 그러기 위해선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2017년을 복기(復碁)해 볼 필요가 있다. 2017년은 1953년 휴전협정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강한 남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황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한반도라는 게임판 앞에 섰다. 여기에 ‘절대군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도전장을 냈다. 또 다른 플레이어 남한에는 탄핵정국이 몰아쳤다. 혼란 속에 탄생한 문재인 정부 앞에는 흔들린 헌정을 수습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종전 이후 2017년 긴장관계 최고조
문재인 정부 취임 나흘 만인 2017년 5월14일 북한은 화성12형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선공에 나섰다. 그러고 나서 8월 ‘스트롱맨’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추가 위협을 가하지 마라.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지금까지 세계가 목격하지 못한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북한은 곧장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화성 12형으로 미국령(領) 괌에 있는 미군기지 주변 30~40㎞를 포위 타격하겠다며 실행 계획까지 내놓았다. 급기야 외환시장엔 ‘한반도 8월 위기설’이 현실화되는 듯했다.
점입가경이라고 했던가. 9월에 접어들자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국제사회는 강력한 경제 봉쇄로 응수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미국을 가상에 두고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15형을 발사하면서 동시에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중국의 중재마저 힘들어진 상황에서 방아쇠만 당기면 전면전이 개시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은 이어졌다.
희극과 비극이 문장 하나로 갈리듯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다. 군사학의 고전 《군사학 논고》를 쓴 로마시대 정치 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의 명언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2017년까지 한반도에서 통했다.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볼 때 이 가설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세상에는 엄연히 주기(cycle)라는 게 있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오는 게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한반도엔 우리가 모르는 사이 ‘화해’와 ‘대화’라는 봄이 찾아왔다. 그 시발점은 2018년 1월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였다.
신년사를 통해 김 위원장은 “미 본토 전역이 사정권 내 있으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있다는 게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면서도 “남조선에서 머지않아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동계올림픽)가 열리는 만큼 대표단 파견을 포함,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며 대화를 제의했다.
이후 남북관계 개선은 일사천리로 전개됐다. 김정은 위원장은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대규모 응원단을 보내는가 하면, 개막식에 친동생인 김여정 북한노동당 제1부부장과 공식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참매2호기’에 태워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폐막식엔 최측근 김영철 북한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보냈다. 이후 상황은 더 드라마틱하다.
남과 북의 두 정상은 4월27일 판문점 우리 측 지역에서 만나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모색했다. 분단의 상징과 같은 판문점은 화해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오전 9시30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두 정상은 악수했다. 깜짝쇼도 연출됐다.
“나는 언제 북한에 가볼 수 있나요?”(문재인 대통령) “지금 함께 넘어가 보지요.”(김정은 국무위원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날 남북은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화해협력을 위한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 화해 무드가 순탄하게 이어진 건 아니다.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체제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다. 그 과정에서 남한은 지렛대 역할을 했을 뿐이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급선무라고 판단되면 어김없이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펼쳤다. 반대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벽에 부딪히면 남한을 향해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각에서 신년사의 의도를 불순하다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 주도의 경제제재로 어려움에 처하자 남한과의 화해 제스처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는 것이다.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이 “국가 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의 세 번째 해인 올해 경제전선 전반에서 활성화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고 밝힌 것에서 북한의 다급함을 읽을 수 있다.
6월12일 싱가포르서 첫 북·미 정상회담
3월초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특사단을 통해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조속한 만남을 희망했다. 이를 미국이 전격 수용함으로써 세기의 대담으로까지 불린 ‘북·미 정상회담’은 막이 올랐다. 하지만 의제 등 쟁점 사안을 놓고 양측이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면서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최종 목표까지 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협상 도중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를 결정하자 부랴부랴 남북은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다시 만나 약식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조속한 북·미 대화 재개를 촉구해 중단될 뻔했던 비핵화 협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6월 중순 싱가포르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을 제외하고 북한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해외 순방길에 오른 김 위원장이 서방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6월12일 오전 9시 센토사섬 카펠라호텔 발코니에서 두 정상은 첫 만남을 가졌다. 올 초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가진 핵미사일 파괴력이 크다고 자랑하는 상황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첫 정상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평화와 번영을 위한 양국 국민의 희망에 따라 새로운 북·미 관계를 수립한다”는 등 4개 항으로 된 합의문을 만들었다.
2018년 우리 정부가 한반도 정책을 펴나가는 데 있어 자주 사용한 단어는 ‘중재’다. 첫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도 숱한 산고를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는 협상의 한가운데 섰다. 이러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빠른 속도로 진행되리라 봤던 비핵화 협상은 점차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와 같은 파국이 재연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해 보였다. 그러나 북·미 양국이 인내심을 갖고 협상 테이블을 떠나지 않는 데는 우리의 중재 노력이 주효했다. 외신이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외로운 협상가’라고 부르는 데는 이러한 인식이 깔려 있다. 12월 중순 발행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The person of the year 2018) 랭킹에서 5위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지구촌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한국의 지도자는 외교적 도박을 감행했다.”
협상 과정에서 중재자의 노력은 쉬운 게 아니다. 어려움은 기본이다. 그렇기에 2018년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뜬 건지 모른다. 9월 평양 정상회담은 북·미, 남북 대화의 정례화와 한반도 비핵화라는 부분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남한 지도자론 처음으로 대중 연설에 나서 ‘한반도 평화’를 강조했다. 통일의 염원이 깃든 백두산 천지에 두 정상이 함께 올라 손잡고 세계인을 상대로 화합의 메시지를 보낸 것도 큰 의미를 담고 있다.
비핵화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낸 해였다. 북한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했다. 미 본토를 겨냥해 준비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도 해체했다. ‘미국의 합의 사항 이행’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기구 사찰을 허용할 뜻도 내비쳤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비핵화’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다.
협상 장기전 돌입…고민 깊은 文
한반도 비핵화는 갈 길이 멀다. 연말 예상됐던 서울 답방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9월 정상회담 이후 남북, 북·미 관계는 냉각기를 갖고 있다. 11월 미 의회 중간선거 전후로 예상됐던 2차 북·미 정상회담도 현재로선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과 북한 양측 모두 상대방을 향해 의미 있는 선물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형국이다. 중재자를 자처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참여정부의 후계자를 자처한다. 어쩌면 한반도 운전자론은 참여정부의 뼈아픈 상처 때문인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북·미 갈등으로 무르익던 남북대화가 2005년 중단된 것을 크게 아쉬워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이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에 추진된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임기 초부터 정부가 남북대화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게 한반도 정세다. 2019년에 또다시 갈등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끈끈한 것 같았던 브로맨스(우정)가 악연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새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는 한반도 정세 변화의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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