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의 진짜 중국 이야기] 마오쩌둥이 빚어낸 권력투쟁 드라마 ①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던 2010년 8월29일 모 국무총리 후보자는 임시 사무실로 쓰던 서울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 로비에서 굳은 표정으로 한 쪽짜리 사퇴 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더는 누가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총리 후보직을 사퇴합니다.”
총리 후보는 이날 오후 트위터에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하늘에서 비를 내리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고, 홀어머니가 시집을 가겠다고 하면 자식으로서는 말릴 수 없다”는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을 인용한 것으로 자신의 사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 내용이다. 이는 당시 국내 중국 전문가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청문회에서 낙마해 총리 후보를 사퇴한 후보자가 “하늘에서 비를 내리려고 하면…”이라고 말한 상황이 실제 마오쩌둥과 2인자 린뱌오(林彪) 사이에 있었던 권력투쟁 드라마와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베이징(北京)에서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1년 9월30일 오후 1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당 중앙판공청 주임 왕둥싱(汪東興)과 함께 베이징 서쪽 향산(香山) 마오쩌둥의 개인 수영장이 딸린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저우언라이는 약 20분에 걸쳐 그날 오전 중국 북동쪽 랴오닝(遼寧)성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 중이던 당시 권력 2인자 린뱌오가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중국 공군 작전부 부부장 출신의 아들 린리궈(林立果)가 모는 영국제 트라이던트기로 이륙해서 중국과 몽골 국경지대를 향해 날아갔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린뱌오는 1955년 ‘원수(元帥)’ 계급을 받은 중국군 최고위 인물로, 1927년 8월1일 중국공산당이 일으킨 최초의 무장폭동인 ‘난창치이(南昌起義)’를 주도하고, 각종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권력 2인자였다.
2인자를 향한 마오의 ‘큰 그림’
그러던 린뱌오는 마오가 1958년에 시작한 무리한 경제정책 ‘대약진(大躍進)운동’과 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벌인 정적 제거 정치투쟁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오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린뱌오가 자신을 몰아내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마오는 1970년 3월초 개막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기막힌 정치 드라마를 연출한다. 당의 실권을 쥐고 있는 린뱌오의 도전을 받아야 하는 형세에 놓여 있던 마오(당시 77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전인대에 참석하지 않은 채 1969년 말부터 중부 후베이(湖北)성 중심도시 우한(武漢)과 자신의 출생지역인 후난(湖南)성 중심도시 창사(長沙)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정작 베이징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2인자 린뱌오 역시 중국 중동부 장강 하류의 쑤저우(蘇州)에서 휴양을 하고 있었다. 마오와 린 둘 모두 상대방과 마주치기 껄끄러워 서로 피한 것이다.
그해 전인대 최고의 정치 관심사는 공석이 된 국가주석 후임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원래 국가주석 자리에는 마오쩌둥이 앉아 있었으나 1959년 4월 마오가 “당과 정부를 다 돌보는 것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경제에 밝은 류샤오치(劉少奇)가 그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류샤오치는 마오의 박해를 받아 1969년 11월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에 가택연금 상태에 빠졌다가 폐렴으로 사망했다. 자연스레 1970년 봄 전인대 최고 관심사는 류샤오치의 후임으로 린뱌오가 선출될 것인가, 린뱌오의 국가주석 선출을 과연 마오가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3월9일 쑤저우에 있던 린뱌오는 측근들을 통해 “헌법상 국가주석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베이징 권부 내에 흘렸다. 마오의 정치적 형편이 자신이 내놓은 국가주석직에 앉아 있던 류샤오치를 핍박해 사망하게 한 마당에 그 자리에 앉겠다는 말을 할 형편이 못 되기 때문에 전인대를 통해 국가주석직 폐지를 주장하던 입장임을 알고, 마오의 견해와 정반대되는 안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린뱌오는 마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도 비서를 통해 마오 측근에게 “주석직에는 마오가 다시 앉아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국가주석에 다시 앉으시라”는 린뱌오의 전갈에 대한 마오의 답은 “린뱌오 동지는 안녕하신가”라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니하오”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린뱌오는 1년 전인 1969년 4월 열린 당대표 대회를 떠올렸다. 나란히 앉아 있던 마오가 느닷없이 발언을 신청하더니 “린뱌오 동지를 당주석으로 선출하고, 나는 부주석을 맡으면 어떤가”라는 놀라운 제의를 하는 바람에 허겁지겁 일어나 “무슨 말씀, 당주석에는 당연히 우리의 위대한 영수(領袖) 마오 동지가 선출돼야 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실패로 돌아간 린뱌오의 마지막 승부수
1970년 4월11일 밤 11시30분 린뱌오는 쑤저우에서 당 중앙정치국에 전화를 걸어 세 가지 안을 제의했다. 국가주석은 당주석인 마오가 겸임해야 하고, 국가부주석 자리는 만들지 않고, 린뱌오 자신은 절대로 부주석 자리에는 앉지 않겠다는 3개 항이었다. 이후의 중국 정치사는 ‘이때 린뱌오가 한 3개 항 제의 가운데 첫째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로, 당시 상황이 마오가 결코 국가주석에 앉겠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에서 한 말이며, 진심은 국가부주석 자리를 만들어 린뱌오 자신이 앉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마오와 린뱌오 정치 드라마의 결론은 “국가주석 자리를 없애자”는 마오의 의견이 통과되는 것으로 귀결됐다. 국가주석직은 1980년대 말까지 되살아나지 않았다. 린뱌오는 아들이 모는 비행기로 중국을 탈출하는 듯했으나, 중국 몽골 국경을 넘자마자 고비사막에 추락했다. 린뱌오의 탈출 사실을 보고받고 마오가 한 말 “비가 온다는데도 엄마가 딴 남자에게 시집가겠다고 한다면, 가시게 할 수밖에 없지(天要下雨, 娘要嫁人, 由他去)”는 이런 의미였다. “린뱌오가 비가 오는지도 모르고 도망가보려 하지만 뜻대로 안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린뱌오 아들이 모는 비행기는 연료가 절반 이상 빠져 있었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진입하기까지 설치된 각종 장애물을 피해 돌아가느라 막상 이륙했을 때는 그나마도 연료가 원래보다 줄어들어 있도록 마오는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총리 임명이 좌절된 우리의 후보자는 린뱌오의 신세였으므로, 마오가 한 말 “비 오는데 엄마가 시집가려고 하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경우라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