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변호사가 보는 재밌는 미국] 국민을 위한 정치인은 있는가
믿기 힘든 일이지만, 11월 초에 치른 미국 중간선거가 이제 겨우 마무리 단계에 들어왔다. ‘단계’란 표현을 쓴 이유는 아직도 개표중인 곳이 한두 군데 더 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는 우편투표 비율이 높다. 그리고 선거 당일에 보낸 투표용지는 모두 유효 처리된다. 따라서 모든 투표용지를 수거하는 데만 수일이 걸린다.
선거 당일 개표가 시작되자 상원에선 공화당이 3석을 더 확보해 다수당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원에선 민주당이 약 23석을 차지해 다수당이 될 것으로 보였다. 거의 한 달여가 흐른 지금 상원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또 하원에선 당초 예상했던 23석보다 훨씬 많은 40석 정도가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중간선거의 공화당, 이겼지만 졌다
특히 의석수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 주 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로널드 레이건식 보수주의’의 보루로 불리던 오렌지 카운티(County·한국의 군(郡) 개념)에서 공화당 배지를 단 모든 후보가 낙선했다. 당선을 확신하던 한국계 영 킴도 막판에 역전당해 고배를 마셨다.
상원에서도 공화당은 딱히 성공을 거뒀다고 하기 힘들다. 의석수를 늘렸음에도 말이다. 이번에 재선에 나선 의석수 35석 중 27석은 민주당 소속이었다. 게다가 민주당 의석에 해당하는 주의 대부분이 트럼프가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을 더블스코어 차로 물리친 곳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공화당의 성공은 반쪽짜리다. 체면치레가 옳은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결국 중간선거는 공화당의 참패라는 게 중론이다.
정치란 어느 나라든 비슷한 양상을 띤다. 때문에 미국 중간선거를 보다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교훈이 있다.
교훈 첫 번째, 패권정치는 한계가 있다
첫째로 패권정치는 오래 못 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고, 법도 질서도 무시한 막가는 행동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힐러리 클린턴보다 300만 표나 덜 얻었지만 희한한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그의 지지층은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환호하는 사람들이다. 신뢰가 확고하다. 단 범위가 좁다.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은 80~90% 정도지만, 미국은 공화당원만 사는 나라가 아니다. 미국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지지도가 45%를 넘은 걸 본 적이 없다. 나머지 55%는 그를 싫어하거나 혐오한다. 중간선거가 끝난 11월25일 갤럽이 조사한 지지도는 역대 최저치였던 35%에 근접했다.
정치인들이 선거운동 중에 과격한 말을 하는 건 예삿일이다. 하지만 일단 당선되면 그런 말을 아끼고 온 국민의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과반은커녕 최고 득표율도 달성하지 못하고 당선된 사람이, 계속 자신의 소수 지지자만을 의식한 정책을 펴 나간다면, 그 정권은 오래 가기 힘들다.
교훈 두 번째, 삶과 연결된 실질적 정책을 내놓아라
두 번째 교훈은, 국민들은 자신의 삶을 향상시켜 줄 실질적인 정책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번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다. 정책 대결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트럼프에 대한 네거티브 공격을 퍼붓는 작전을 구사할 것인가 하는 선택지를 두고서다.
민주당은 정책 대결을 택했다. 오바마 케어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건강보험 제도를 수호하자는 기치 아래 후보들이 선거에 나섰다. 2009년 건강보험법이 통과됐을 때만 해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사안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이듬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에서 70여석을 잃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평생 처음 건강보험이라는 걸 가져본 미국인들은 건강보험 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를 수호하자는 민주당에도 동조했다. 지난 10년간 별다른 대체 법안 없이 무조건 건강보험법을 폐기하려고 50여 차례나 시도했던 공화당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선거 당일 출구 조사에 의하면,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이슈는 건강보험 제도 수호였다. 미래를 보고 만든 제도는 당장 인기가 없더라도 언젠가 효자가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천군만마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
교훈 세 번째, 소수에 취하지 말고 다수를 보라
세 번째 교훈은 이번에 출마한 후보들을 주목해 보면 떠오른다. 이번 선거에서 미국을 놀라게 하거나 경악하게 했던 당선자들이 있다. 뉴욕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는 29세의 나이로 당내 경선에서 10선의 조 크라울리를 물리치고 출마했다. 그리고 당선돼 미국 전역에 놀라움을 안겨줬다. 또 미시시피에서 상원에 출마한 신디 하이드 스미스는 온갖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인기를 얻어 당선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중간선거의 ‘빅스타’는 텍사스에서 상원에 출마했다 아깝게 패한 민주당의 베토 오루어크다. 그는 코르테즈처럼 자신을 사회주의자라 정의하지 않고, 스미스처럼 트럼프보다 더 트럼프적인 발언을 하지도 않는다. 그는 예의 바르고 겸손했다. 이 모습이 그가 텍사스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의 스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기부금으로 정치 단체의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기부금 모금의 신기원을 일궈냈다. 벌써부터 202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라는 지지자들의 호소가 빗발친다.
오루어크는 진실, 희망, 비전, 그리고 시빌리티(Civility·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는 시민들 간의 품격 있고 사회 질서를 존중하는 행동방식) 등의 메시지를 내세웠다. 그는 텍사스 전역의 254개 카운티를 모두 방문하는 기록을 세웠다. 광활한 텍사스를 샅샅이 돌며 그가 한 첫 번째 일이 ‘경청’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예스냐 노냐” 라고 묻는 질문에 늘 “예스” 아니면 “노”라고 정확히 답한 뒤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질문을 받으면 답하지 않고 은근슬쩍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기존 정치인과는 달랐다. 반대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밝히는 그의 당당한 모습에 반대 측인 공화당원들도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오루어크는 자신을 특정 이념주의자로 정의하지 않고, 당과 지역을 떠나 미국인으로서 자국의 미래를 얘기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이었다. 또 이야말로 국민들이 원하는 지도자 상이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혹은 “나는 백인 우월주의자다”라고 정의하는 건 자신을 한정 짓는 일이다. 그것이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밖으로 나가보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반면 오루어크의 메시지인 시빌리티, 진실, 희망, 비전 등은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의 힘을 갖고 있다.
국민의 삶에 다가가지 않는 한 정치는 성공할 수 없다. 이 평범하지만 종종 무시당하는 사실이야말로 이번 미국 중간선거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이다. 우리나라 정치인은 어떤가? 미래를 내다보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그런 혜안을 지닌 인물이 존재는 하는지, 찬찬히 둘러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