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첫 비핵화 언급…北 “대화”, 美 “OK”, 韓 “휴우~”
“잔치를 또다시 열었지만, 역시 먹을 건 없었다.”
한반도 관련 정상회담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다. 올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과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9월18~20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모두 여론의 반응은 예상만큼 높지 않다. 왜 그럴까. 일단 회담 시작 전 대중의 기대감이 높다. 매번 그랬다. 이번 회담 역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갑작스러운 방북 취소 이후 북·미 간 화해 무드가 다소 사그라지면서 돌파구로서의 기대감이 컸다. ‘이번만큼은 뭔가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보다 다소 낮은 수준에서 합의안이 나왔다. 물론 청와대의 공식 논평처럼 이벤트성이었던 정상회담을 정례화, 상시화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회담 결과보다 현장 방문과 같은 이벤트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남북 양측 모두에게 부담거리가 될 수 있다.
9월19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가진 합동기자회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우리의 앞길에는 탄탄대로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앞길에는 생각 못 했던 도전과 난관, 시련도 막아 나설 수 있습니다”라고 한 말에 남북 정상회담의 명암(明暗)이 모두 담겨 있다.
이번 회담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북한의 비핵화 여부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이 각각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도 북한의 비핵화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아서다. 여기서 분명한 메시지의 기준은 비핵화 기준과 시점, 로드맵 등 구체적인 사안이다. 회담 전 정치권은 김정은 위원장이 방송에 나와 구두로라도 비핵화와 관련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최고지도자의 말을 중시하는 북한으로선 이보다 더 명확한 입장표명은 없기 때문이다. 대북 문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보유 핵무기를 언제까지 얼마나 폐기할 것이며, 이를 검증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들이는 것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봤다.
그런데 9·19 평양선언에서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한반도)를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고 밝혔다. ‘핵’이라는 말은 나왔지만, 시기와 범위 등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닫았다. 그렇다고 해서 회담 결과를 폄하할 필요까지는 없다. 지난 4·27 판문점 선언문에서 ‘어떤 형태의 무력도 사용하지 않는다’며 원론적인 설명에 그친 것과 비교할 때는 확실히 진일보했다.
金 “비핵화 앞길에 탄탄대로만 있지 않다”
현재 북·미 대화는 미국의 선(先) 비핵화 조치, 북한의 선(先) 종전선언 앞에서 멈춰서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미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싱가포르에서 체결된 합의안대로 체제보장 성격의 종전선언이 체결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가기 힘들다는 뜻을 보내왔고 이를 받아본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대화를 중단시켰다”고 보도했다.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은 확고하다.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인 9월15일 노동신문은 ‘당치 않은 신뢰타령으로 더러운 정치적 야욕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글에서 “종전선언은 조선반도에서 핵전쟁 근원을 들어내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고 분명히 밝혔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9월7일 국회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성 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가 파격적인 신고 조건을 내걸었는데도 북한이 종전선언 전에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회담 전 청와대가 비핵화와 관련한 협상이 쉽지 않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또다시 종전선언 주장을 되풀이할 경우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운전자론은 장기간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완강한 입장인 북한은 왜 입장을 바꾼 걸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현실론이다. 미국 측 대화 파트너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출구전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미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11월 예정된 중간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은 북한도 결코 바라는 구도가 아니다. 문 대통령이 평양으로 떠나기 하루 전인 9월17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두 차례나 전화통화를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강경화 장관이 평양으로 떠나기 전 비핵화와 관련해 미국 쪽의 명확한 입장을 들었을 것이며, 정상회담에서 관련 내용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찌 보면 애초부터 구체적인 비핵화 방안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오기 힘들었을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비핵화는 북·미 협상의 의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 평양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비핵화 방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자연스레 관심은 문 대통령의 방미로 모아진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9월19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 참석차 9월23일 미국을 방문하며 트럼프 대통령과는 24일 만나는 것으로 예정돼 있다”고 밝혔다. 윤 수석은 그러면서 “이번에 만나게 되면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정인 특보도 9월19일 평양에서 취재진과 가진 브리핑에서 “선언문에 담지 못한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文, 9월 방미에서 北 입장을 美에 설명
북한의 협상카드는 이때 나올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내놓을 수 있는 비핵화 카드엔 뭐가 있을까. 첫 번째 비핵화 기간이다. 힌트는 9월6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한 대통령 특사단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 내 비핵화를 하겠다”고 말한 부분에 있다. 또 8월5일(현지 시각)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폭스뉴스 선데이에 출연해 “김정은 본인 스스로가 1년 내 비핵화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9·19 평양선언이 발표되고 1시간 후 트럼프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사찰(Nuclear inspections)을 허용하는 데 합의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김정은 위원장이 최종 협상에 부쳐질 핵사찰을 허용하는 것과, 또 국제 전문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영구적으로 폐기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트위터에서 주목할 점은 ‘최종 협상에 부쳐질(subject to final negotiations)’이라는 표현과 트럼프가 비핵화(Denuclearization)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점이다. 이는 추후 진행될 북한과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의 첫 번째 임기 중 비핵화를 완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종연구소는 최근 펴낸 ‘정세와 정책(남북정상회담에서의 한반도 비핵화 방안 협의 방향)’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현 임기 내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탄두 폐기를 4단계에 걸쳐 진행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올해 말까지 북한이 ICBM의 50%를 해외 반출하는 것을 1단계, 내년 여름까지 나머지 50%를 반출하는 것을 2단계로 봤다. 그런 다음 내년 말까지 핵탄두 절반을 해외로 내보낸다. 마지막으로 2020년 여름까지 나머지 절반을 내보내면서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을 영구불능화 하고 우라늄 농축시설을 해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보고서를 쓴 정성장 박사는 “올 연말까지 북한이 ICBM의 50%를 해외 반출한다면, 미국은 정치적 선언 수준의 ‘한반도 종전 선언’을 수용하고 문재인 정부가 연내 남북 철도, 도로 착공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대북제재를 부분적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합의안에서 흥미로운 점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영구폐기 입장을 밝혔다는 점이다. 물론 전제조건으로 ‘미국의 상응 조치’를 달았다. 여기서 말하는 ‘상응 조치’란 종전선언, 즉 다시 말해 싱가포르 선언 합의 이행 여부다. 영변 핵시설은 북한에는 핵기술의 핵심이다. 동창리에 위치한 미사일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이 참여해 영구적으로 폐쇄키로 한 것도 대미(對美) 화해 메시지로 봐야 한다. 미국 강경파들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대 해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를 북한이 수용한 것은 미국의 비핵화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검증’에 대해 북한이 처음 긍정적으로 화답했다고 볼 수 있다.
전례로 비춰볼 때 미국은 소련 등과 군축 협상을 할 때 핵물질보다는 미사일 등 운반추진체 폐기에 주력해 왔다. 북한 핵문제에 미국 정부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ICBM 기술이 고도화되면서부터다. 북한이 ICBM을 포기한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핵억지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맹인 일본의 우려도 불식시킬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아쉬운 대목도 많다. 우선 이번 회담 결과에 대해 미국 강경파들이 받아들일지 장담하기 힘들다. 볼턴 보좌관 등 강경파들은 시기와 비핵화 범위, 로드맵 없이 종전선언은 힘들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정성장 박사도 “한반도 비핵화와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구체적 로드맵에 대한 합의 없이 이렇게 지나치게 점진적인 접근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협상 의도에 대한 회의감을 확산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 박사는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9월말 한·미 정상회담, 올해 서울 남북 정상회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ICBM과 핵무기 폐기, 주요 핵시설 폐쇄 및 해체 그리고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북·미 관계 정상화, 대북제재 해제 등의 일정표를 빨리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미래 핵 부분에만 맞춰진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운반체 폐기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영구폐쇄, 영변 핵시설 영구폐기는 모두 ‘앞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번 합의문에는 현재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와 관련해 언급한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워싱턴의 보수진영에서 이번 회담 결과를 낮게 평가한다면 아마도 현재 보유 핵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북한 전문가는 “김정은 위원장이 현재 핵과 관련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보유한 핵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다는 의지로 볼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북·미 회담은 재개될 수 있을까. 재개 가능성은 절반 이상 된다. 일단 우리 정부가 중간에 보증을 서고 북측 입장을 미국 측에 설명할 경우 회담 테이블 복귀에 대한 트럼프의 부담은 한결 줄어든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해야 하는 트럼프로서는 북핵 카드를 자신의 외교 치적으로 부각시키려 할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 회담장 복귀는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도 한층 높아졌다. 폼페이오 장관의 반응이 이를 뒷받침한다. 폼페이오는 9월19일(현지 시각) 성명을 통해 “오늘 아침 카운터파트인 리용호 외무상을 다음 주 뉴욕에서 만나자고 초청했다”며 “우리는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만날 것을 북한의 대표자들에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경우에 따라 김 위원장의 워싱턴 방문이 현실화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방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9월말 한·미 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을 방문, 2차 북·미 정상회담을 11월 미 의회 중간선거 이전에 열어,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안에 합의할 경우 미국이 보상 차원에서 종전선언을 하는데 그 장소가 연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서울이 되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 자리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까지 참여하는 4자 정상회담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비핵화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가정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따라 연내 종전선언 가능
이번 회담에서 군사적 긴장완화와 관련해 구체적인 합의안을 낸 것 역시 긍정적이다. 비핵화가 북·미 간 회담 의제라면, 군사적 긴장완화는 남북이 당사자다. 문 대통령은 평양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 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이번 회담의 목표는 첫째 남북한 사이에서 군사적 대치 상황으로 인한 긴장과 무력 충돌 가능성, 그리고 전쟁의 공포를 우선적으로 해소하는 것이고, 둘째는 비핵화를 위한 북·미 대화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비핵화 부분에서는 중재자 역할만 하고 군사적 긴장완화 부분에 집중한 것은 정상회담의 실효성을 높인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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