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찾아낸 ‘의전 5원칙’
외교 의전의 원칙으로 흔히 꼽히는 5가지가 있다. 존중(Respect), 상호주의(Reciprocity), 문화반영(Reflecting culture), 서열(Rank), 그리고 오른쪽(Right)이다. 통틀어 ‘5R’이라고도 한다. 9월 18~20일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5R이 모두 녹아든 대형 행사였다.
① 존중
존중의 뜻이 담긴 북한 의전은 문재인 대통령이 9월18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른바 ‘공항의전’이다. 당초 예상대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는 직접 공항에 나와 문 대통령 내외를 맞이했다. 곧이어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북한 인민군 의장대가 사열 명령을 기다렸다.
의장대원의 수는 300여명이었다. 인민군 의장대장은 문 대통령에게 ‘각하’란 호칭을 쓰며 경례했다. 또 21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통상적으로 외국 원수에게 예포 21발을 쏜다. 최고 수준의 예우를 갖췄다는 뜻이다.
② 상호주의
인민군 의장대의 환영식 자체가 상호주의에 입각한 의전이라고 볼 수 있다. 상호주의는 국가끼리 동등한 가치를 교환한다는 의미다. 외교의 기본 원리 중 하나다. 지난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때 우리 정부도 국군 의장대를 도열시켰다. 그 수는 이번 인민군 의장대의 규모와 비슷했다. 다만 예우 수준은 인민군 의장대가 더 높았다. 판문점 정상회담 땐 예포가 생략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9월18일 오후 문 대통령을 목란관으로 초대해 만찬을 가졌다. 이날 상에는 백설기 약밥, 해산물 물회, 칠면조 냉찜, 상어날개 야자탕, 백화 대구찜, 숭엇국 등 흔치 않은 고급 메뉴들이 올랐다.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도 판문점 정상회담 때 평화의 집에서 국빈급 만찬을 준비한 바 있다. 당시 식사는 민어 해삼편수, 한우 숯불구이, 문어냉채, 스위스식 감자전, 달고기(생선) 구이 등으로 꾸며졌다.
③ 문화반영
9월19일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5·1 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했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38노스가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한 예술일 것”이라고 표현한 공연이다. 여기엔 한복을 입은 무용수들의 전통 춤부터 훌라후프를 활용한 현대 무용까지 다양한 예술이 펼쳐진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의 문화를 알리기에 적합한 공연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본 무대는 원래 빛나는 조국과 내용이 조금 다르다고 한다. 정확히는 체제 선전이 빠지고, 남측을 환영하는 내용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우리 측 입장을 최대한 고려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을 기획 단계 때부터 신경 쓴 것으로 보인다.
④ 서열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날 열린 첫 번째 정상회담 때, 우리 측에선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배석했다. 반대쪽엔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각각 마주보고 앉았다. 양국 실무진의 급을 맞춰 짜여진 테이블이다.
자리 배치는 의전 서열에서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중요하게 여겨진다. 문 대통령이 평양 공항에 내린 날에도 서열에 신경 쓴 흔적이 엿보였다. 이날 문 대통령은 줄지어 서있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 리수용 당 국제담당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 김수길 군 총정치국장, 로광철 인민무력상 등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눴다. 당과 군에서 입김이 센 순서대로 도열한 것이다.
⑤ 오른쪽
이번 남북정상회담 영상을 보면, 대부분의 공식석상에서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오른쪽에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9월18일 목란관 만찬, 19일 옥류관 오찬·대동강 수산물식당 만찬, 또 이날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까지. ‘손님에게 상석인 오른쪽을 내어준다’는 의전 원칙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원칙은 문화·종교적으로 왼쪽을 불경하게 여기는 서양의 전통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오른쪽의 영어 표기 right가 ‘옳다’는 뜻을 지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