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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인사이트] 정부 “北, 인프라 지원할 테니 개혁·개방해라”

정부의 올가을 대북(對北) 접근 드라이브에 탄력이 붙고 있다. 올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 만나 합의한 ‘판문점 선언’ 비준을 위한 동의안이 9월11일 국회에 제출된 데 이어, 추가 남북 정상회담과 연내 종전선언 등이 리스트에 올랐다. 대북제재 위반 논란이 있었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도 본격 가동 단계에 접어들었다. 대북특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인 9월7일 문재인 대통령은 외신 인터뷰에서 “올해 말까지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진도를 내는 것이 목표”라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의지를 드러냈다.

 

2015년 8월26일 평양 주체사상탑에서 바라본 대동강 너머의 창전거리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 ⓒ 연합뉴스

 

정부, 내년도 2986억원 인프라 지원


청와대와 정부 구상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대북 인프라 지원과 경협 추진 대목이다. 통일부가 제출한 판문점 선언 비준동의안에 첨부된 비용추계서는 내년에 철도·도로 협력과 산림협력 등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비용을 2986억원으로 잡고 있다.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갈 사업의 총액 대신 내년 예산만 동의안에 반영한 걸 두고 ‘비용을 축소해 제시한 꼼수’라는 비판도 나오지만, 정부는 개성-신의주 철도·도로 개·보수 등 사회간접자본(SOC) 개발 지원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8월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이 성사 직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취소되면서 소원해지는 듯하던 북한과 미국 관계도 정상궤도에 오르는 분위기다.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에 화답하면서 조만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백악관은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를 통해 2차 정상회담 개최를 요청한 사실은 물론, 북·미 간 정상회담 일정을 조율하고 있는 점까지 공개하면서 평양을 향한 유화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북한 김정은 체제가 비핵화 문제 등에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할 경우 한국과 미국이 대북제재 해제를 넘어 경제지원과 관계정상화 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문제는 김정은 체제가 어떻게 이런 정세변화에 호응해 ‘채찍에서 당근으로의 전환’을 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과거를 걷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서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며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모종의 변혁을 꾀할 것임을 공언했다.


한 국가체제의 정책노선 변화는 통상적으로 3단계 과정을 거쳐 진화하고 구체화한다. 첫 단계는 상징적 변화의 모습을 통해 개인이나 체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다음으론 상징적 변화를 넘어서는 의미 있는 단계의 진입이 필요하다. 여기에선 시범적인 수준에서라도 가시적인 성과나 결과물이 도출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실질적인 변화의 단계에 도달하게 하는 게 전형적인 변화 시스템이다. 북한은 앞서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상징적 변화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남한 내 보수 성향으로의 권력교체와 깐깐한 대북정책 노선에 불만을 품고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같은 호전적 행태로 돌변하면서 남북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결국 대북제재를 자초하면서 북한 경제는 난관을 겪어야 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을 승계했다. 북한의 낙후된 경제 현실과 김정은의 이에 대한 인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만경대유희장 사건이다. 집권 첫해인 2012년 5월 이곳을 방문한 김정은은 당시 유희장의 ‘배 그네(바이킹선)’ 앞 구내도로가 심하게 깨진 걸 보고는 “한심하다”고 질책했다. 이어 보도블록 사이 곳곳에 잡초가 자라난 것을 보면서 허리를 굽혀 직접 풀을 뽑았다. 그러면서 그는 “유희장이 이렇게 한심할 줄 생각도 못했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소리”라고 관계자들을 질책했다. 


김정은은 핵무기 개발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도발적인 행보를 보이는 상황에서도 내부적으로 개혁·개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했다. 2012년 6월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걸 골자로 한 6·28 개혁조치를 시작했고, 2014년엔 기업의 자율권 부여를 핵심으로 하는 5·30 조치를 단행했다. 평양 개발 프로젝트도 눈길을 끌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초부터 평양에 고층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는 뉴타운 형태의 개발사업을 시작했다. 평양 중심구역의 대동강변 등에는 이미 김정은 지시에 따라 53층 주상복합 건물과 46층 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섰다. 최근엔 개인 자본이 투입된 아파트 건설과 쇼핑센터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신규 주택 건설사업에 개인사업자가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서구식 아파트 분양 모습도 나타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주택 임대업이 출현하고 소(小) 토지와 시장 매대를 사고파는 자본주의적 현상도 점차 번지고 있다고 한다.

 

2017년 4월13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맨 오른쪽)과 고위 인사들이 려명 주거단지 개관식에 참석했다. ⓒ AP 연합

 

김정은에게 개혁·개방은 양날의 劍


북한 노동당 핵심 간부들이 5월 베이징(北京)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고향인 산시성(陝西省), 상하이(上海)와 저장성(浙江省) 등을 방문해 경제현장을 중심으로 중국의 경제 실태를 살펴본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中關村) 과학원 문화정보중심과 중국 농업과학원, 철도 관련 시설 관리기관인 베이징시 기초시설투자유한공사 등을 돌아본 북한 참관단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한 자리에서 “중국의 경제건설과 개혁·개방 경험을 학습하기 위해 중국에 왔다”고 언급해 관심을 끌었다.


일각에선 김정은이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나설 경우 체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한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등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부터 공들여 온 군사노선 포기에 대한 군부 등 강경파의 불만과 노동당과 군부 기득권 세력의 이권다툼으로 인해 체제에 균열이 생길 요소가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한·미 정보 당국의 평가는 “김정은이 예상보다 안정적으로 북한 체제를 통치하고 있다”는 지난 수년간의 입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김정은의 게임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국면을 맞는 분위기다. 레드카펫이 깔린 회담장을 나서면서 맞닥뜨리게 될 엄중한 국제정세나 현실과의 싸움이다. 무엇보다 북한 체제를 개혁·개방으로 이끌어 국제사회로 나가는 문제는 김정은에게 절대 권력은 물론 가족·인척과 추종세력의 명줄을 좌우할 수 있는 도박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북·미 정상회담 개최 하루 전인 6월11일자 보도에서 “김정은에게 개혁·개방은 양날의 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규모 대북 지원 청사진과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비핵화에 상응한 파격적 선물에 김정은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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