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LPGA 진출한 프로골퍼 박성현…“실패한다고 해도 그 안에 엄청난 배움과 경험 있을 것이라 믿어”
‘Lucete’(루케테·밝게 빛나라).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데뷔를 앞두고 있는 박성현(24)의 왼쪽 손목에 새겨진 문신 내용이다. 외모만 보면 고생을 모르고 자란 듯 ‘밝음’ 그 자체이지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1부 투어에 입성하기 전까지 그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시드 선발전을 치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고교 시절 ‘입스’(Yips·불안증세)에 빠져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간신히 1부 투어에 올라가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 ‘OB’(Out of Bounds)를 내며 ‘OB 울렁증’이란 불명예를 떠안기도 했다. 박성현이 왼쪽 손목에 ‘Lucete’라고 문신을 새긴 건 이런 모든 어려움을 딛고 밝게 빛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절 대신 희망을 띄우고 싶은 작은 몸부림이기도 했다.
최근 LPGA투어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올 시즌 주목할 만한 선수로 박성현이 올라와 있다. 2016년 KLPGA투어에서 7승을 거뒀고, LPGA투어에도 7차례 출전해 6차례나 13위 이내의 성적을 거둔 데다 5개 메이저대회에선 두 차례나 3위 이내에 입상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LPGA가 신인 박성현에게 이런 관심을 보이는 건 박성현이 보인 가파른 상승세 때문이다. 2016 시즌이 시작될 때만 해도 27위였던 세계 랭킹이 2016년 시즌을 마칠 때는 10위로 올라섰다.
17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폭발적인 드라이버샷을 앞세우는 박성현. ‘필드 위의 닥공(닥치고 공격)’을 직접 펼쳐 보이는 그를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따로 만나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걸 크러시’(Girl Crush·여성이 여성에게 환호하는 현상이나 그런 환호를 유발하는 여성)로 대변되는 그답게 기자의 사적인 감정이 푹 담긴 상태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LPGA는 내 운명…우승 없이 직행
박성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골프채를 잡았다. 엄마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지만 골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TV를 통해 LPGA 경기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선수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어린 나이라 선수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TV로 경기를 볼 때마다 엄마한테 ‘저 선수가 누구야?’ 하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선수가 안니카 소렌스탐이었다. 그다음이 캐리 웹이었고, 박세리·김미현 프로였다. 어린아이 눈에도 그분들의 플레이가 굉장히 멋있어 보였던 거다. 자연스레 ‘나도 골프 잘해서 미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 그랬던 내가 실제 LPGA투어에서 골프를 하게 됐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나한테는 TV에서만 봤던 무대, 아무나 못 가는, 정말 잘하는 선수들만 모이는 곳인데 내가 그곳에서 활약하게 된 것이다.”
물론 2016년 초청선수 신분으로 LPGA투어를 경험했지만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하는 올 시즌의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박성현은 TV를 통해 ‘구경했던’ LPGA가 이렇게 빨리 자신의 골프 인생으로 쑥 들어오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한다.
박성현의 LPGA 진출은 기존에 LPGA에 진출했던 선수들과 그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LPGA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퀄리파잉스쿨을 통해 시드권을 받았던 데서 벗어나 온전히 상금 랭킹으로 자격을 부여받았다.
KLPGA투어에서의 빼어난 성적으로 2016년 LPGA투어에 초청선수 신분으로 참가했던 박성현은 우승 한 차례 없이 68만2000달러의 상금을 받아 상금랭킹을 21위까지 끌어올렸다. LPGA투어는 상금 총액이 랭킹 40위 이내에 들면 투어 카드를 받을 수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미국에 진출한 선수는 박성현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런 조건이 다 충족된 상황에서도 박성현은 LPGA 진출을 망설였다고 한다.
“2015년 인천 영종도에서 열렸던 LPGA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최종 라운드 전날 저녁에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 만약 내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난 바로 미국에 가지 않을 거야.’ 우승자는 LPGA투어 시드권을 받게 되는데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미국 진출을 감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틈틈이 LPGA 4대 메이저대회를 포함해 7개 대회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출전했고, 준우승 1회 포함 4차례 톱10 안에 들면서 상금이 쌓였다. 그 재미가 만만치 않았다. LPGA 메이저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전인지와 우승 다툼을 벌이면서 투어의 재미와 감흥이 크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조금씩 내 마음이 미국을 향하고 있었다. 상금 랭킹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걸 놓치지 말고 갖고 가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박성현은 상금 랭킹 대신 우승자 신분으로 LPGA투어에 진출했더라면 더 모양새가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현은 우승이 없어 아쉬울지 몰라도 그는 2016년에 에비앙 챔피언십 준우승, US여자오픈 3위, ANA 인스퍼레이션 6위 등 LPGA투어 첫 무대에서 굉장히 놀라울 만한 성적을 거뒀다.
박성현이 미국 진출을 결심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영어’였다. LPGA에 진출한 선수들이 첫해부터 영어로 인터뷰하는 걸 목격하고선 자신감을 잃었던 것이다.
“(전)인지를 비롯해 모두 영어를 정말 잘한다. 미국 가자마자 영어로 인터뷰하는 걸 보고 덜컥 겁이 나더라. 난 영어를 전혀 못하는데 다른 선수들은 영어로 인터뷰를 하니 기가 죽었다. 무엇보다 난 한국을 좋아한다(웃음). 한국 음식, 생활, 문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이곳이 좋다. 그래서 해외 전지훈련을 가더라도 한두 달 짧게 다녀왔었다. 입도 짧고, 언어도 부족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외국에서 잘 생활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가장 컸다. 그러나 걱정만 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일단 부딪히면서 적응해 가고 싶었다.”
박성현은 2016년 11월7일 기자회견을 갖고 LPGA투어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2017년 1월에 열리는 LPGA투어 준비에 전념하기 위해 KLPGA투어 잔여 대회를 모두 포기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박성현은 디펜딩 챔피언 자격인 2017 시즌 개막전 현대차 중국여자오픈에 불참했고, 상벌위원회 논의를 거쳐 벌금을 낼 위기에 처했다. 일부 팬들은 박성현이 KLPGA투어를 마무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며 비난의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주 안 좋았다. 미국으로 가는 문제를 빨리 결정했더라면 욕이라도 덜 먹었을 텐데 결정이 늦어지면서 준비시간이 부족했고, 어쩔 수 없이 잔여 대회를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중요한 대회에 참가하고 싶기도 했지만 어느 한 대회만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아예 다 안 나가는 게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마무리가 아쉽다는 지적에는 공감한다. 무척 아쉬웠다. 덕분에 KLPGA 대상도 놓쳤으니 말이다.”
LPGA 실전 경기에서 단점 보완
박성현에게는 시즌 최종전이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팬텀클래식 with YTN대회였다. 만약 박성현이 최종 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2m 거리의 버디 퍼트를 성공했다면 톱10에 진입하면서 대상 포인트를 쌓았겠지만, 그 버디 퍼트에 실패하는 바람에 고진영과 1점 차이로 KLPGA 대상을 놓치게 됐다. 남은 대회에 출전해서 기회를 엿볼 수도 있었지만 박성현은 LPGA투어 진출 선언과 함께 더 이상의 KLPGA 대회 출전은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남은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1점을 더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라 깨끗이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었다. (고)진영이한테 대상이 돌아간 건 당연했다. 충분히 받을 만했고 받을 자격이 있는 선수였다. 시상식에서 서로 축하를 주고받았다.”
박성현의 장점은 시원한 장타다.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가 264.94야드로 한국에서 1위에 해당한다. 반면에 쇼트게임에 약점을 보인다. 박성현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KLPGA도 아닌 LPGA 대회에서 경기 중 부족한 부분을 시험해 봤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2016년 LPGA 대회를 치르며 느낀 점이 있다면 어프로치가 너무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초반에는 그로 인해 실수가 잦았다. 그럴 때마다 경기 도중에 연습하면서 해 봤던 부분을 실제 시도해 보곤 했다. 주위에선 ‘경기 중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놀라워하지만 매 경기를 다 잘 칠 수 없다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이라도 해서 대회를 마치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LPGA에 진출한다면 미리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해 보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LPGA 대회는 잔디가 생소해서 그런지 새로운 상황들이 계속 만들어졌다. 그럴 땐 성적이 안 나와도 기분이 좋았다. 생소한 코스, 갤러리들, 선수들, 이런 환경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했고, 시도해 봤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방법은 박성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드라이버 입스로 ‘진하게’ 고생했던 그는 3년간 입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학교 시절의 스윙 영상을 찾아보며 문제점을 찾아냈고, 가까스로 입스에서 벗어났지만 티 박스에 올라서면 스윙 타이밍을 잡지 못해 OB를 내기 일쑤였다. 아마추어 시절, 그리고 프로 입문 후 힘든 일들을 많이 겪은 박성현은 KLPGA에서도 연습장 훈련과 경기 중 보완 훈련을 통해 자신만의 골프를 완성해 나갔다.
“연습장은 연습장일 뿐이다. 평평한 매트 위에서 한 가지 샷으로 치게 되는데 골프장은 단 한 홀도 평지가 없다. 오르막 라인이 있다면 내리막 라인이 있어 연습장에서 했던 샷이 실전에서 적용되기 어렵다. 그걸 깨달은 이후부턴 새로운 샷을 연습하거나 보완할 점이 생기면 라운드 중에 해 본다. 직접 해 보고 몸으로 느끼고 익히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인지와 박성현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 중 ‘대세녀’ 두 명을 꼽는다면 단연 전인지와 박성현이다. 2016년 LPGA에서 루키 시즌을 보낸 전인지는 시즌 초 불거진 허리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으로 신인왕에 올랐다. 박성현은 전인지를 LPGA 대회에서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전)인지를 2016년 LPGA 대회에서 만났을 때 한국에서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더라. 나보다 한 살 어린데 골프와 인생에선 나보다 어른 같았다.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많이 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인지는 내가 LPGA에 진출하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해서 고마웠다.”
박성현은 전인지, 중국의 펑산산과 함께 LPGA투어 에비앙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를 같은 조에서 치렀다. 전인지는 이 대회에서 나흘 연속 선두를 고수했고, 결국 남녀 메이저대회 사상 최저타인 21언더파 263타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인지가 마지막 챔피언 퍼트를 성공시키는 장면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축하의 의미로 샴페인을 뿌리기도 했다. 2016년 데뷔해 우승이 없어 마음고생이 심했던 인지가 메이저대회 우승으로 멋지게 첫 승을 장식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스코어 카드를 반납하러 가는데 인지가 계속 울더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안아주고 격려해 준 기억이 새롭다.”
2014년 KLPGA에서 박성현의 존재감은 극히 적었다. 그러다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15년 6월 롯데 칸타타 여자오픈 최종일 마지막 홀이었다. 1m 거리의 버디 퍼트를 놓치며 연장전에 돌입했다가 안타깝게도 우승을 놓쳤고, 2주 후 그는 한국여자오픈에서 정규 투어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다. 박성현이 골프팬들에게 짜릿한 감동을 선사한 순간이었다.
“골프하는 친구들이, 후배들이 내가 겪은 일들을 보며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많은 어려움에 처했어도 난 계속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LPGA 데뷔 해(年)가 성공적으로 끝날지 실패할지 알 수 없지만,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그 안에 엄청난 배움과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LPGA에서도 희로애락을 반복하며 성장해 가는 골프를 하고 싶다.”
2017 LPGA투어 개막전은 오는 1월27일 ‘퓨어 실크 바하마 LPGA 클래식’이다. 개막전부터 박성현이 출전할지 여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그러나 박성현의 올 시즌 목표는 확고하다. “KLPGA에선 신인왕을 받지 못했다. LPGA에선 신인왕에 꼭 오르고 싶다. 데뷔 첫해 1승과 신인왕을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박성현은 골프계에서 유명한 팬클럽 ‘남달라’를 두고 있다. 팬클럽 회원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남녀노소’란 말이 정확하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부터 할아버지·할머니들까지 박성현의 팬을 자처한다. 박성현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팬클럽 회원들이 살고 있어 가까운 마트에 갈 때도 옷을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기자도 박성현도 ‘빵’ 터졌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보이시한 외모,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그는 분명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게 진짜 ‘걸 크러시’였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