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공포, 독일 극우를 깨우다
1인당 하루 2리터의 식수 5일 치, 열흘 치 비상식량, 현금, 난방용품, 석탄. 독일 연방정부가 국민들에게 때아닌 ‘쇼핑 목록’을 내밀었다. 지난 8월24일 토마스 드 메지에르 독일 내무부 장관이 발표한 ‘시민 방위 전략안’ 내용 중 일부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이 전략안에는 재난이나 안보 위기 상황 발생을 대비해 개인이 갖춰야 할 물자의 목록과 행동요령이 실려 있다. 전략안은 얼핏 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지만 독일 사회는 술렁였다. 잠시 잊고 지내던 초여름의 연쇄 테러 사건이 다시 기억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전략안이 공식 발표되기 전 언론을 통해 “새 전략안에 징병 재실시가 담겨 있다”는 정보가 흘러나오면서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우려를 나타냈다. 기독민주연합(CDU)과 자유민주당(FDP) 연합정부는 2011년 징병을 중단했지만 징병제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국방 위기가 발생할 경우 국회의 3분의 2 이상이 동의하면 다시 징병제를 실시할 수 있다는 단서도 달아뒀다. 이 때문에 독일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에 대비해 다시 병역의무를 부과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보도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하지만 새 시민 방위 전략안 어디에서도 징병을 다시 실시하겠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독일 내무부가 공개한 70쪽 분량의 전략안에서 ‘병역의무’는 단 세 차례 언급된다. 이 중 징병제 재실시가 직접 언급된 부분은 노동력 수요에 대한 조항이다. 조항은 ‘긴장 및 방어 상황 발생 시에도 기본법이 정한 직업 선택의 자유는 유효하지만, 병력이 부족할 경우 연방노동청은 예외적으로 시민의 생업을 중단시키고 인명보호 및 국방 분야에 배치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즉 이미 2011년에 징병을 중단하면서 결정한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방위 전략안에 징병제 재실시 내용 없어
드 메지에르 내무부 장관 역시 징병제 부활 소동을 의식한 듯 기자회견 자리에서 “냉철한 지성으로 재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하는 일”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는 특히 새 전략안이 지난 7월 안스바흐와 뷔르츠부르크에서 발생한 테러에 대한 반응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전략안이 마련된 것이 1995년이니만큼 업데이트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미 2012년부터 새 시민 방위 전략안 마련 작업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드 메지에르 장관은 “전략안을 지금 발표하는 이유는 전략안이 이제 완성됐기 때문”이라며 기자들의 질문을 일축했다.
징병 재실시 논란을 거들었던 독일 언론 역시 “실제로 징병이 다시 실시될 가능성은 적다”며 해명에 나섰다. 뉴스 사이트 ‘슈피겔 온라인’은 “징병 중단 이후 독일 연방군은 이미 모병제로 전환 중이며, 비록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징병제 부활은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고 국방계획을 또다시 불안하게 만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매체는 병역의무에 찬성하는 장성들도 이 같은 이유에서 징병 부활에 반대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민 방위 전략안 발표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녹색당과 좌파당 등 야권은 정부가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주(州) 지방선거를 열흘 앞두고 불안감을 조성해 보수 표 결집을 유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드 메지에르 내무부 장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회심리학자인 울리히 바그너는 진보 성향의 뉴스 사이트 ‘쥐트도이체 차이퉁 온라인(SZ 온라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시민 방위 전략안을 발표하는 것 자체가 시민들에게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진다고 지적했다. 독일 안팎에서 발생한 테러로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인지라 정부의 전략안 발표도 테러 위기의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가가 안전에 더욱 신경 쓰겠다고 지속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며 정치권이 이 같은 심리적 효과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징병제 재실시 논란은 헛소동으로 마무리됐지만, 그 바탕에 자리한 불안감은 여전하다. 이를 반영하듯 독일 정치권은 이미 경찰력 증가와 공공장소의 감시카메라 설치 확대, 통신기록 의무보관기간 연장 등을 논의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불안감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화장품과 세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유통소매업체 데엠(dm)은 지난 6월말부터 호신용 스프레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사나운 동물의 공격을 막기 위한 제품이지만 실제로는 호신용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지난 연말 쾰른 중앙역에서 집단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후 반년이 넘도록 수사에 진전이 없자 여성들이 자구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독일에서 호신용 스프레이는 관할 관청의 허가가 있어야만 소지할 수 있는 반면, 동물을 쫓는 용도의 스프레이는 누구나 살 수 있다. 법의 허점과 여성의 불안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상술이다.
전문가들은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자구책을 마련하는 추세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진보 성향의 뉴스사이트 ‘쥐트도이체 차이퉁 온라인(SZ 온라인)’이 만난 독일 경찰 노동조합의 한 대변인은 “호신용 스프레이는 단지 안전하다는 허상을 제공할 뿐이며, 무기로 대응할 경우 오히려 상황이 격화될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시민 불안감으로 호신용 스프레이 판매 급증
이렇게 번져 나가는 불안과 공포는 실제 독일의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꾸고 있다. 9월4일 실시된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주의 지방선거에서는 반(反)이슬람을 내건 극우 성향의 독일대안당(AfD)이 20.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사회민주당(SPD)에 이어 제2당에 올라 파문을 일으켰다. 기민련이 19%로 제3당으로 내려앉자 앙겔라 메르켈 책임론도 불거졌다. 선거의 쟁점이 지방 현안이 아니라 메르켈 정부의 난민 정책에 있었기 때문이다. AfD는 북아프리카 난민을 이슬람 테러리스트라고 선동하고 외국인 혐오 정서를 부추김으로써 메르켈의 난민 정책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메르켈이 내년에 있을 총선에서 총리 자리를 수성하지 못할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다.
사회심리학자 울리히 바그너는 테러에 대한 불안이 독일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심리적 원인으로 냉전 시대와 달리 누가 우리 편이고 적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꼽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북아프리카 난민을 테러리스트로 낙인찍는 것 또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자 ‘적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결과다. 그렇게 생겨난 적의 이미지는 난민 보호시설을 공격하고, 외국인을 폭행하는 극우파 혐오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작센-안할트주(州) 의회가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 발생한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범죄 2162건 중 80%가 넘는 1749건이 극우파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드러났다. 눈먼 혐오가 불안의 증폭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2016년 독일의 우화(寓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