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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의 퇴위 의향에 복잡해진 왕실 사정

일본의 왕이 바뀔까. 7월13일 NHK와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은 아키히토(明仁․83) 일왕이 생전에 퇴위하겠다는 뜻을 주변에 표명했다고 비중있게 보도했다. NHK는 궁내청 관계자를 인용해 일왕이 “살아있는 동안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궁내청 관계자에게 밝혔다고 전했다. 교도통신은 “일왕은 적어도 1년 전부터 생전 퇴위 의향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수년 내로 일왕의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徳仁․56)가 왕위를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개혁적이고 소탈한 성격으로 일본 사회에서 상당히 존경을 받고 있다. 애처가이기도 한 그는 1993년 미국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외교관이자 ‘평민’인 오와다 마사코(小和田雅子)와 결혼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처럼 평화주의에 대해서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55번째 생일을 맞은 지난해, 관저인 동궁어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과거사에 대한 솔직한 신념을 밝힌 적이 있다. 당시 왕세자는 “나는 전후 태생이라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겸허하게 과거를 되돌아보고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친의 역사의식이 대물림됐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은 생전에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갖고 있다. 유력한 후보는 나루히토(왼쪽) 왕세자다.
아키히토 일왕은 종전 뒤 ‘위령(慰靈)’ 문제와 한국 고대사에 관해 깊은 관심을 드러내왔다. 2005년 사이판의 한국인 전몰자 위령지인 ‘한국평화기념탑’에 참배하고 2007년 도쿄의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사망한 고(故) 이수현씨를 소재로 만든 영화를 관람하는 등 한국에 친근한 행보를 보여 왔다. 일본이 종전 7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8월15일에는 “지난번 대전(大戰·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을 거론하는 등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마다 전쟁에 대한 성찰을 강조했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일왕 자리에 오를 경우 일본 왕실과 한국과의 관계는 종전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거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미 그는 노령의 아키히토 일왕을 대신해 왕실 외교 업무를 맡아온 경험이 많다.

수순대로라면 왕위 계승 1순위인 그가 일왕 자리에 오르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순조로운 왕위 계승을 위협하는 몇 가지 암초들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일본 내에서는 그의 왕위 계승을 두고 반대여론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왕세자 부부 사이에 아들이 없다는 점이다.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빈 사이에는 도시노미야 아이코(敬宮愛子․15) 공주가 있다. 문제는 일본 왕실법상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돼있다는 점이다. 반면 아키히토 일왕의 차남 후미히토 왕자(文仁․51)와 가와시마 키코(川嶋紀子․50) 왕자비 사이에는 아들 히사히토(悠仁․10)가 있다. 이 때문에 왕위 계승 순서는 나루히토 왕세자, 후미히토 왕자, 히사히토 왕손 순으로 이어진다.

나루히토의 안정적 즉위를 흔드는 또 다른 요인은 왕세자빈 마사코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다. 마사코 왕세자빈은 원래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실과의 혼인 이후 왕실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우울증의 일종인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 2003년 말부터 왕실 공무를 보지 못하고 장기 요양 생활 중이다. 그의 ‘적응장애’가 장기화되자 궁 안팎에서는 ‘마사코 빈이 병을 핑계로 각종 왕실 행사에 불참하는 등 공무에 불성실하며 왕세자가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각에선 ‘왕세자 퇴진론’마저 제기된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스스로 물러나 동생 후미히토 왕자에게 왕위 계승 1순위를 넘겨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거 일본의 보수적 주간지인 《주간문춘》이 독자 1500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음 왕후로 적합한 사람’으로 62%가 후미히토 왕자의 부인 키코 왕자비를 꼽은 반면 마사코 빈은 38%에 불과했다.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 왕자 중 누가 일왕으로 적합한가’리는 질문에도 75%가 히사히토 왕자를 지목했다. 다만 ‘나루히토 왕세자와 동생 후미히토 왕자 중에서는 누가 일왕이 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나루히토 왕세자가 56%를 얻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집권 자민당 역시 장남인 나루히토보다 차남 후미히토에 우호적이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전범의 역사를 축소․은폐하려는 아베 정부와 민족주의자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해왔다. 아베 정부의 우경화 움직임에 상당한 위기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현 일왕과 왕세자는 현실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일왕이 ‘생전 퇴위’ 카드를 던진 건 아베 총리가 추진 진하는 개헌을 막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나온다. 현재 일본헌법은 일왕을 단순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두고 왕실의 정치 개입을 제한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추진하는 개헌안에는 일왕의 지위를 ‘국가 원수’로 격상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 일왕이 생전 양위할 뜻을 밝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온라인 매체 ‘초간 선데이’는 “(일왕이 퇴위할 경우) 왕실전범 개정이 헌법 개정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이 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일본 보수 우익들은 차남 후미히토 왕자를 선호하고 있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후미히토는 일본 내에서 ‘난봉꾼’으로 불리며 부정적인 시선을 받아왔다. 

만약 후미히토가 일왕 자리에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왕손 히사히토가 태어난 뒤부터 공공연하게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적대감을 보이며 왕위 야욕을 드러내 보인 후미히토다. 그는 ‘덴노(일왕) 정년론’을 주장하며 노령인 일왕의 왕위 계승을 압박해왔다. 덴노 정년론은 겉보기에는 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의 건강을 걱정한 발언처럼 들리지만 많은 이들은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기에 아키히토 일왕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일본 황실 내부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심각한 내분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그는 평소 일본의 극우주의자 및 국수주의자와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일왕의 지위는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베 정권의 ‘보통 국가’로 가는 길에서 일왕의 지위가 국가 원수로 격상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후미히토의 극우적 역사관이 더해진다면 한국 정부와 일본 왕실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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