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예산감시 시민행동’ 팀장을 맡았던 정창수씨(38)는 한 달에 한 번씩 정부 기관에 ‘밑 빠진 독’을 선물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을 반기는 공무원은 아무도 없었다. 단순히 밑이 빠진 독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밑 빠진 독’은 불명예의 상징이었다. 예산 낭비가 가장 심한 곳에 주는 ‘밑 빠진 독상’의 부상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공무원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밑 빠진 독’을 받고 낙담했다. 건설교통부는 24회 수상자였다. ‘경인운하 건설 사업’으로 1조원의 예산 낭비를 초래했다는 이유였다. 심대평 전 충청남도지사는 26번째 수상자였다. 대규모 농수산물 물류센터의 운영 실패로 충청남도에 4백40억원의 부채를 안겼다는 이유였다. 정씨가 선심성 행사로 지적한 ‘하남국제환경박람회’는 행사를 중단했고 ‘천년을 후회할 문’이라고 시상했던 ‘천년의 문’은 사업이 크게 축소되기도 했다.
9년 동안 예산감시 운동을 펼친 정씨는 이후 재무행정 분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하며 예산 전문가로 거듭났다. 정부 예산 정책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두꺼비가 전하는 예산 이야기’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해 행정부와 언론 등에 보내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이후 정씨는 정치권에 투신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특이하게도 ‘철새 보좌진’의 행보를 보였다. 민주노동당 소속이었던 조승수 전 의원을 도왔다가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을 도왔고 지금은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을 보좌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지만 정작 그는 정치를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프리랜서 정책 컨설턴트로 정책 자문하며 예산 낭비 감시
정치를 전혀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정책, 그중에서도 특히 예산 관련 정책뿐이었다. 어떤 정치 세력에 속할지는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구상한 정책을 구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예산결산위원회 소속이었던 조승수 전 의원을 도왔던 그는 원희룡 의원을 보좌해 감세·증세 논쟁을 뒷받침해주었다. 원의원이 대선 출사표를 던지며 들고 나온 ‘근로소득세 폐지’도 그의 예산 지식이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근로소득세 폐지’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예산 정책을 통해 제시했다. 요즘 그는 최재천 의원실에서 한·미 FTA가 초래할 사회적 손실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의 사용 문제 등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
정치와 무관한 이런 ‘정책 특보’ 행보는 사실 우리 정치에 무척 낯선 모형이다. 정치인들의 정치 공세를 돕는 ‘정치 특보’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 정치’에서 ‘콘텐츠 정치’의 시대로 옮아가면서 정씨와 같은 정책 전문가들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 요즘의 경향이다. 정씨는 “정책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와 별개로 정책이 추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정치가 발전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