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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회색 지대’ 진입…정부 “확장세” 민간 연구소 “하락세” 딴소리

 
한국 경제가 그레이 존(회색 지대)으로 들어가면서 경기 진단과 전망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고 있다. 경기가 나아지리라는 확신도 없고 나빠지리라는 징후도 뚜렷하지 않다. 경기 상황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들이 방향을 잡기 힘들 만큼 혼재되어 나오고 있다. 상반기 국내총생산(GDP)이 5.7%나 되어 잠재성장률을 웃돌았으나 소비 심리는 위축되는 징후를 보이는가 하면 기업실사지수(BSI)는 100을 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BSI는 100을 넘지 못하면 기업인이 앞으로 경기가 위축될 것이라고 보고 100이 넘으면 경기가 나아질 것으로 보는 심리지표이다.

경기 변동을 예측하기 힘든 것은 그만큼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경제 주체인 소비자·생산자·정부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는 지갑을 열어야 할지 헷갈리고 생산자는 투자를 늘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거시경제 정책의 경우 경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추진되어야 하지만 정부·여당 사이에서도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을 둘러싸고 다른 견해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제 이 혼란에 민간 경제 연구소까지 가세했다. 통화 정책을 주도하는 한국은행이나 재정 정책을 집행하는 재정경제부는 경기 확장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으나, 삼성경제연구소나 현대사회경제연구원을 비롯한 민간 경제연구소는 경기가 하강 국면에 진입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은행은 8월10일 금융통화위원회를 개최하고 콜금리(은행 간 단기 차입금리) 목표치를 연 4.25%에서 4.5%로 올리기로 의결했다. 실물경제가 확장 국면에 본격 진입해 소비 심리가 개선되고 있고 유가가 고공행진을 거듭하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건설 투자는 부진하지만 수출과 설비 투자가 꾸준히 늘고 민간 소비가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 한국은행의 경기 해석이다.

6월 소비재 판매액이 내구재 판매 증가에 힘입어 5월 5.8%에 이어 6월 5.2% 늘어났다. 한국은행은 앞으로 고용 사정이 완만하게나마 나아지고 가계 대출도 늘어날 것으로 보여 회복 기조를 이어가리라고 전망했다. 6월 설비 투자는 자동차 투자와 국내 기계 수주(34.9%)가 크게 늘어 전체적으로 2.9%(5월 2.5%)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은 또 국내 기계 수주의 호조를 바탕으로 기계류 투자가 당분간 늘어날 것으로 보여 설비 투자 증가세는 전반적으로 나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중국 ‘주춤’, 세계 경기 후퇴 조짐

제조업 생산도 반도체·금속·선박을 중심으로 5월 12.6%에 이어 6월에도 11.4%나 늘어났다. 제조업 평균 가동률도 2개월 연속 상승했다. 5월 80.6%에서 6월 81.9%로 늘어난 것이다. 서비스업 생산은 증가세가 둔화되었으나 여전히 5월 5.6%에 이어 6월 4.5%로 늘었다. 수출도 7월 12.4% 늘면서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건설 경기가 부진하고 고용개선 추세가 주춤하고 있으나 경기 확장 국면을 뒤집을 만한 변수는 아니다.

 
재정경제부도 몇 가지 미시경제 해석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은행의 경기 진단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박병원 재경부 1차관은 “성장세가 다소 조정을 받더라도 하반기 경기 급랭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 국책 연구기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지난해 2분기부터 경기는 잠재성장률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간 경제 연구소는 이에 대해 극단적일 정도로 반대 의견을 밝히고 있다. 경기가 확장 국면을 끝내고 하락하고 있거나 최소한 확장 국면의 끝자락까지 왔다는 것이다. 김범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몇 가지 경기선행지표를 보면 경기 확장 국면이 정점에 다다랐거나 이미 하락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올해 1·2분기 각각 1.2%와 0.8%로 낮아지고 있고 재고·출하 지표에서도 재고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비스업 생산도 6월에 4.5% 늘었다고 하지만 전달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재고 증가는 제품 소비가 준다는 반증이고, 서비스업 부진은 서비스 상품에 대한 소비가 당초 예상보다 부진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김범식 수석연구원은 “소비가 힘을 잃어가는 징후가 뚜렷하다”라고 말했다.

엇갈린 진단, 경제 활동 위축 부추길 수도

이 와중에 세계 경기도 하락 국면으로 접어드는 징후가 뚜렷해지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세계 경기 후퇴는 한국 경제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경기선행지수는 지난 5월부터 하락세로 반전했다. 세계 경제의 기관차인 미국의 경제성장률도 1분기 5.6%에서 2분기 2.5%로 추락했다. 앞으로 소비 심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고용시장이 냉각될 조짐이 뚜렷하다. 중국은 경기 과열을 잠재우기 위해 초강수의 투자 억제책을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두 거대 시장에서 건너오는 소식은 반갑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마저 민간 경제 연구소의 경기 진단을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최근 ‘7월 경제 동향’을 발표하면서 “국제 유가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 경기가 한풀 꺾일 조짐을 보이고 있어 경기 상승 둔화 추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또 6월 준내구재와 서비스 소비를 중심으로 소비 성장세가 둔화하고 건설 투자 관련 지표인 건설기성액 증가율의 하락폭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재정경제부는 ‘경기 상승 모멘텀은 다소 약해지고 있으나 경기 상승 과정에서의 일시적 조정(Soft Patch) 성격이 강하고 제조업은 아직까지 확장 국면에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현대자동차 장기 파업이나 집중 호우로 인한 수해 같은 돌발 변수로 경기 확장세가 잠시 주춤한 것일 뿐 정부가 공공건설 부문 투자를 본격화하면 곧바로 해소된다는 것이 재경부의 전망이다. 더욱이 경기가 확장 국면에 들어선 지 이제 8~9개월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경기 확장 기간이 17~44개월로 평균 31개월 지속되었다. 따라서 당분간 경기 확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기대할 만하다. 하지만 민간 경제 연구소는 2000년 이후 경기 순환 과정의 주기가 짧아지고 높낮이도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기가 2003년 7월부터 확장 국면에 진입했다가 7개월이 지나지 않아 하락세로 반전한 적이 있다. 9개월가량 지속된 현재의 경기 확장세도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정경제부는 실물경제 지표보다 심리지표를 더 걱정한다. 지금처럼 경제가 그레이 존에 들어와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경제 주체의 심리가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는 매월 발행하는 경제 동향 보고서인 <그린북>에서 ‘일시적 요인에 의한 실물지표 변화가 심리지표 위축까지 이어질 경우 소비 등 실물지표 둔화로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은 8월3일 정례 브리핑에서 “7월 지표가 일시적으로 둔화되더라도 시장이 과민 반응하지 않도록 관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경기 진단과 전망을 둘러싸고 하나의 목소리가 나올 필요는 없지만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일은 경제 주체의 경제 활동을 위축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 탓인지 재경부는 최근 민간 경제 연구소장과 거시경제를 점검하는 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하나의 동일한 경제 모습을 두고 보는 시각에 따라 상황 인식을 달리할 수 있다.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콘센서스(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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