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진 5월. 남쪽에서 피기 시작하는 꽃을 따라 벌이 날고, 벌을 쫒아 ‘벌쟁이'는 이동한다. 5월14일 저녁에 도착한
경상남도 의령읍. 아카시아나무가 울창한 용덕고개를 지나 죽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벌쟁이 세 팀이 자리잡고 있었다. 벌통을 놓는 위치도 앞이 트인
남동쪽, 물가가 일반적이다.
강원도 횡성이 고향인 朴元 (29)씨는 경력 5년의 벌쟁이. 열흘 전에 친 천막앞에 벌통 60개가 2열종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저녁 6시경 벌들이 붕붕거리며 소문(벌통출입구) 근처를 맴돌자 박씨는 “꿀이 덜 찼다'고 걱정한다. 꿀을 가득 물고 들어온 벌은 꽁지가
땅에 닿을 듯 낮게 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수평으로 난다는 것이다.
15일 새벽 6시. 채밀하는 날이다. 벌통 속의 꿀을 뜨는 ‘채밀'은 벌쟁이들에게는 가장 신나고도 바쁜 일. 특히 아카시아꿀
채밀은 1년 작황의 절반을 차지하므로 인근 벌쟁이들이 서로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이웃에서 벌을 치는 尹永哲(32)씨와 金東倫(30)씨 외에도
2명이 더 왔다. 한명이 재빨리 벌통 뚜껑을 열자 박씨가 훈풍기에서 쑥김을 내여 그안에 불어넣는다. 쑥김을 피해 벌들이 한족으로 몰린 사이,
꽃가루며 꿀이 저장된 소비(벌집)를 재빠르게 꺼낸다. 벌통 하나에는 소비가 7~10개 들어가는데, 소비 하나당 벌 2천마리가 들어사니까 벌통은
2만마리가 모여사는 벌들의 아파트인 셈이다. 10개의 소비를 꺼내어 채밀기에 넣고 10여초 동안 돌린다. 소비에 담겨 있던 꿀이 채밀기의 바닥에
고였다가 부착된 꼭지를 따라 드럼으로 옮겨진다. 이것을 병에 넣어 포장하면 일반소매로 팔리는 꿀이 된다.
꽃 5백60만송이에서 꿀 1kg 얻어 “벌들의 세계는 인간세계보다 엄격한 질서가 잡혀
있어요. " 벌에 쏘일까봐 검은 망을 쓴 채 작업하는 박씨의 설명이다. 보통 벌 한통마다 여왕벌이 한마리, 수벌이 1천만리, 그리고
나머지가 일벌이다. 일벌은 벌집 안에서 일하는 내역봉과 바깥에서 일하는 외역봉으로 나뉜다. 외역봉이 식물의 꽃 속 꿀샘에서 수분이 40~50%
함유된 꿀물을 50mg 가량씩 물고 들어온다. 이것을 벌집 안에 넣어두면 내역봉이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저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수분함유량은 약 20% 정도. 벌이 꿀 1kg을 채집하기 위해서는 약 5백60만송이의 꽃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 마리의 여왕벌을
중심으로 하는 1통에서 채밀되는 양은 10~13kg 가량.
장마철이 되면 벌은 일을 나가지 못하고, 따라서 먹이도 없다. 이때에는 ‘사양기??틀에 설탕물을 부어주는데, 일부 악덕업자들은
간혹 다량생산을 목적으로 꽃이 만개한 때에도 설탕물을 지나치게 부어 꿀을 묽게 만들기도 한다. 근면하기로 아려진 벌도 먹을 것이 있으면
게을러지기 때문이다.
벌쟁이의 생활을 묘사한〈어둠 속을 향하여〉라는 소설로 신춘문예에 준당선한 張光 씨는 벌쟁이들의 생활이 “천막을 치고 다니는
달팽이"같다고 한다. 2월에 제주도 유채밭에서 벌을 기르고 4월에 유채꿀을 한번, 5월초 경상도에서 아카시아꿀을 2~4번 뜨고, 6월에는 밤꿀을
뜨러 중부지방으로 간다. 7월에는 북나무꿀을, 8월에는 들깨꿀이나 메밀꿀을 뜬다. 꿀은 종류에 따라 색깔과 맛이 다르다. 양봉 경력 7년의
尹永哲씨9전남 곡성 출신)는 '꿀의 질은 입맛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며 '탁 쏘고 굴 특유의 강한 향이 있는 것이 좋은 꿀'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설탕맛에 길들어 있어 독하지 않은 꿀을 선호한다고 한다. 또 유채꿀은 더운 여름이 되면 끓어넘치고, 아카시아꿀은 한해 겨울이
지나면 굳게 마련인데도 일반인들은 터무니없는 상식으로 진짜꿀?가짜꿀?좋은 꿀을 판별하려든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 양봉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60년대 중반 이후, 양봉업은 6·25로 폐허가 된 산림 속에서 움튼 싸리나무를
밀원으로 삼아 일취월장했다. 그러다가 5·16 이후 대대적인 산림녹화를 위한 사방사업에서 아카시아나무가 선택됨에 따라 지금은 주종이 과거의
싸리꿀에서 아카시아꿀로 바뀌었다. 아카시아꿀은 5월10~20일이 최적기이며 경기도 일대에서 6월 6~7일경 끝난다.
영세 양봉업자는 현대판 집시 박씨는 지난 23일 2.5톤 화물트럭을 빌려 벌통과 가재도구를
싣고 새로운 밀원지를 찾아 경기도 파주를 향했다. 열흘 전보다 훨씬 검게 그을린 얼굴의 박씨는 “작년만 해도 서울을 거쳤지만 올해엔 벌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올라왔다"고 전한다. 벌들이 ??초코병?? 때문에 반이나 죽었다는 것이다. 이 병은 곰팡이균에 의한
것으로 알에서 부화한 후 번데기로 자라다가 어른벌이 되지 못하고 몸이 굳어 죽는 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85년 처음으로 발견됐다.
'프로펜살나트륨'이란 약이 있긴 하지만 약효가 신통치 않아 이직하는 양봉업자가 속출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러나 작황과 관계없이 꿀 가격은 10년을 두고 그대로 변함이 없고 올해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양봉업자들은 내다본다. 꿀
가격은 국내 1백여개의 양봉대기업, 양봉조합, 그다음 소규모 양봉업자를 거치면서 정해진다. 한국양봉협외 柳永秀사무국장은 “전국 5개의
양봉조합에서 가격조정 기능을 맡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세 중간상인들이 가격담합을 하기 때문에 꿀값을 제대로 못받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아카시아꿀 2.4kg들이 1병은 소매가격으로 2만5천원선. 양봉업자들은 또 산림청이 매년 5~6월에 갖는 '항공약제 살포시기??가
아카시아 채밀시기와 겹쳐 뜻하지 않은 피해를 보기도 한다. 올해에도 산림청은 지난달 21일 성남과 남양주에 항공방제를 실시한 뒤 양봉업자들의
하의에 부딪히자 용인?평택 등 나머지 지역은 채밀이 끝나는 6월중순으로 연기했다.
국내 양봉업자 5만명 중 3천~5천명 정도를 헤아리는 이동 양봉업자들은 집 대신 자동차와 텐트 속에서 사는 현대판 집시들이다.
그래서인지 이들 중에는 총각이 유난히 많다. 때로는 몇 달씩 혼자 산에서 살아야 하는 자연속의 생활 탓인지, 아니면 양봉업이 ‘하느님과
동업'이라고 표현될 만큼 기후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들에게서는 자연을 r대하는 겸허함이 느껴진다. 파주에서 여름에는 양봉원을,
겨울에는 찻집을 경영한다는 金東倫씨는 '6월7일경까지 꿀을 뜬 뒤 여름벌을 기르러 강원도에 내려가야겠다'고 한다. 벌들은 그곳에서 꽃을 찾아 날
터이고, 자신은 꿀이 고이기를 기다리며 시를 쓰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