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탄압이 극심했던 87년 5월. 작곡가 李建鏞은 몇사람의 동료와 함께 ‘호헌철폐, 직선개헌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때 한 일간지에는 ‘음악인들도 서명’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이 기사화됐다. 이 제목에는 6 · 29선언을 앞두고 이땅의
정치상황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 음악인들까지 서명했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 음악인이라면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고의
예술이나 추구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어온 풍토에서 작고가 이건용은 예외적인 경우에 든다. 그는 어두운 현실을 음악이론에 수용해왔을 뿐만 아니라
오선지 위에 ‘오늘 · 여기 · 우리’의 시대상을 쉬운 음악어법으로 옮겨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온
작곡가이다.
“비구죽죽이 내리는 저녁 사창가 골목에서/내게 다가와 살그머니 팔걸었다가 되돌아가는 그사람/당신
아니었을까/…/담넘어 방석집 희미한 골방에서 노래부르며 하염없이 젓가락 두드리다 간드러지는 그사람/당신 아니었을까/닭장차 타고 수갑에 채여가다
괴로운 내가 쳐다보면/황급히 쇠그물망 사이 푸른 소매로 얼굴 가리고 고개 돌리던 그사람/당신 아니었을까”
88년 그가 작곡한 <하종오 戀詩> 가운데 <당신이었을까>의 일부이다. 이 시에 나오는 ‘당신’은 그가
86년 곡을 붙인 김정환의 시 <황색예수의 노래>에 등장하는 황색예수와 같은 대상이며 일찍이 한용운 시에 나오는 ‘님’의 이미지와
맥이 닿아 있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노래가 들어 있다. 위에 든 두곡말고도 황지우의 시에 곡을 붙인 <잠든 식구를 보며> (87년)와
<만수산 드렁칡>(87년), 성서의 시편 가사에 곡을 붙인 <분노의 시>등이 모두 그렇다. 그중에 <황색예수의
노래>는 대중가수 송창식이, <하종오 연시>는 안치환이 노래하여 순수예술주의가 빠지기 쉬운 허위의식을 극복하였다. 특히
“국악관현악으로도 오늘의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만수산 드렁칡>과 “듣기는 쉬워도 부르기는 수월치 않은”
<하종오 연시>를 대중성에 갖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으로 스스로 꼽는다.
이건용의 80년대 창작활동은 주로 작곡가 동인그룹인 ‘제3세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81년 6월에 처음 발표회를 가진 이래
해마다 2회씩 작곡발표회를 해온 제3세대에는 이건용을 주축으로 해서 진규영, 허영환, 정태봉, 유병은, 강준일, 이경화, 이만방, 김수원 등의
작곡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우리 음악이 살아나려면 선진국 · 후진국의 도식을 뛰어넘어 우리 음악만의 자생적인 신분성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아래 작곡활동을 펼쳐왔다.
제3세대 창작운동의 전개방법론을 이건용은 이렇게 제시한다. 첫째는 자생적 문화창출을 위해서 전통문화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이 땅의 민중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음악이 쉬운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는 우리 문화에 뿌리를 둔 음악이라면 우리의 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80년대 한국음악계에서 이건용의 역할을 자리매김해보면 작곡가로서의 활동 못지 않게 이론가로서의 활동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악평론가 문옥배는 80년대 민족음악론을 이끈 세 음악이론가로 이강숙, 노동은과 함께 이건용을 꼽는다. 79년 이강숙에게서
출발한 ‘한국음악론’은 이건용이 뛰어들게 됨으로써 보다 지평이 확대되며, 이에 노동은에 의해 한국음악론이 민족음악론으로 값할 수 있게끔 일련의
연구작업과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는 90년대의 계획에 대해 “창작보다는 이론쪽에 보다 치중할 생각”이라고 밝히는데 그 이유를 제도권과 비제도권, 민족음악과
순수음악, 서양음악과 전통음악, 전문가와 비전문가 등 숱한 ‘계’를 이루고 있는 한국음악계에 이론으로써 올바른 창작의 방향을 알려주는 일이
자신의 창작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금부터 10년 뒤인 1999년 12월에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이교수는 “김일성대학의 교환교수로 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로 통일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