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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 함께 어우러져

  83년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원시적 에너지가 넘치는 무대로 연출해냄으로써 李炳焄(38 · 현대예술극장 상임연출가)은 일약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로 부상하였다. 80년대 연극계에 소극장운동이 큰 물결을 이루게 되었음에도 일부 상업주의적 계산 때문에 질이 떨어진다는 비난도 있었던 터라 무대공간의 논리적 분석에 바탕을 둔 그의 무대가 무척 돋보였던 것이다. “재기가 번뜩이며 전통과 현대를 다같이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연극평론가 韓相喆교수의 지적이나 金文煥교수의 “다양한 훈련을 거쳤으므로 무대적 기능이 뛰어나고 연극을 예술로 만들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평가는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서울예전을 졸업, 시립무용단에서 1년간 무용을 배웠고 10년 이상 오태석과 안민수 밑에서 조연출가로 있었다. <꾸러기와 요술쟁이>(86년) <마법왕 듀란다트>(87년)를 연출한 이외에도 이정희무용단에서 <살풀이>라는 주제로 6회 이상 연출을 하는 등 연극 이외에도 다수의 무용, 오페라무대 공연도 맡아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으며 88년에는 서울 극평가그룹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연극이라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관객과의 만남입니다. 총체적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임, 소리의 균형을 중요시합니다.” 그런 그가 80년대의 연극계에서 거둔 성과는 87년 2월부터 6개월간 공간사랑에서 공연하던 <돈내지 맙시다>로 더욱 굳혀진다. 검열이 강화되던 시기에 2만명을 모은 이 연극은 이탈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의 극본을 한국의 정치상화에 맞춰 번안했다. 또 당시 KBS시청료거부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묘한 연상작용을 일으켜 ‘시말서’를 썼다고도 한다. 당시의 검열제도에 대한 이씨의 느낌은 당연히 씁쓸할 수밖에 없다. “검열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어느 순간 무의식적이 되어버린 자율적 검열’로 인해 연극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사실”이라면서 앞으로 해결돼야 할 과제로 지적하기도.
 대학 캠퍼스나 지하에서 판을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던 마당극이 공개적으로 공연되면서 ‘민족극 한마당’이란 민간주도의 대형페스티발로 발전한 것이 80년대 연극계의 중요한 변화이다. 이씨는 그러나 마당극에 대해서는 시각을 달리 한다. “마당극은 연극의 전부가 아니라 연극과 공존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마당극은 이념으로만 치달아 인간의 상상력을 말살시키고 있습니다. 마당극은 한국인의 심성이 무엇인지, 또 이 시대의 상상력은 어떠한가 하는가를 파악해야 관객에게 감동을 주게 됩니다.”

 90년대에는 민족극을 현대적 해석으로 수용, 우리만이 갖는 연극양식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파악한 그는 90년대 연극계의 또다른 과제로서 ‘이 시대의 스타 만들기’를 들고 있다. 전문인의 육성과 확보가 연극계의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이라 한다. 자신이 이같은 주장은 “장인의식을 지닌 배우가 필요하다는 연극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예진흥원기금을 받아 7개월간의 연수를 위해 지난 31일 프랑스로 떠난 그는 “관객을 찾아다니는 서구의 연극을 중점적으로 보고 오겠다”고. ‘禪心不忘初衷’이라는 신념을 갖고 내딛는 그의 90년대 장정이 연극계의 충전작업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연성작품 요구 커질 듯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에 우리는 동의한다. 90년대의 연극을 생각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이다. 그러나 막연히 어떤 소망만을 나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현재의 추세를 바탕으로 하여 앞날을 ‘만들어가는’ 진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국제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연극과의 호흡이 열린 셈인데, 사회주의국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연극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연극을 해외에 소개할 수 있는 준비가 좀더 착실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다른 예술분야보다 더욱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연기 · 연출 · 무대미술분야에서 많은 인적교류가 국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연극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리라 본다.  둘째로 우리는 다양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다소간의 기복은 예상되지만 우리는 소득수준의 상승, 자유시장의 증대, 고학력화, 취업구조의 다양화, 도시화, 여성의 사회진출 증대 등등의 추세가 계속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민의 문화적 필요도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잠복된 상태에서 촉발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연극은 이와 같은 필요에 부응하여 다양하면서도 일정한 문화적 수준을 지켜나갈 수 있는 대응조처를 마련해야 한다. 연령, 사회계층, 성 등에 따른 다양한 연극들이 출현하게 될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과 같이 경성을 띤 작품계열 보다는 연성을 띤 작품들에 대한 요구가 더욱 상승할 것이 예상된다.  셋째로 우리는 지방화를 생각할 수 있다. 국제화에 대비하면 모순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세계가 점점 좁아질수록 우리는 ‘고향’에 대한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지역사회를 공동사회로 묶어가는 축제의 필요가 더욱 절실해질 것인데, 연극도 이에 대비해야 한다. 이는 연극개념의 확대와 병행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추세들에 대한 대응은 연극의 전문화없이는 좌절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설 문화부의 예술정책이 이를 북돋우는 방향으로 세워질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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