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민 전 회장·정인용 전 재무부장관 지상 대면
大韓船州의 최대 주주였단 尹錫祚씨(현 서주산업 회장)는 89년 2월 국제그룹보다 하루 앞서 헌법소원을 내 국제그룹과 같은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5공화국 때부터 빼앗긴 회사를 되찾겠다는 집념을 불태워 왔다. 이 점은 명성 그룹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나 명성그룹 도산은 정치적 성격이 짙은 반면 대한선주는 비교적 덜하다. 대한선주는 국제그룹처럼 부실 기업이라는 명목으로 정리됐다.
대한선주의 헌법소원 결과가 주목되는 것은, 그 결과에 따라 5공 때 정리됐던 부실기업 원상회복 문제가 첨예한 쟁점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86~88년 정리된 부실 기업 수는 기준에 따라 틀린데, 적게는 57개에서 많게는 5백 여개로 추산된다. 윤회장은 회사가 넘어간 직후인 87년 6월 주거래은행이었던 외환은행과 인수 기업인 한진해운을 상대로 ‘주식 및 경영권 양도계약 무효확인’ 소송을 서울민사지법에 냈으나 기각당했었다. 또 당시 정리작업을 주도했던 鄭寅用 전 재무부장관에 대해서도 직권남용 및 공갈미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해놓은 상태다.
정인용씨는 국회가 대한선주 정리 의혹을 파헤치던 88~89년 국회 청문회와 국정조사 증인으로 채택됐다. 당시 필리핀에 본부를 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로 재직하던 그는 귀국을 거부해 ‘국회에서의 증인 감정에 관한 법률’ 위한 혐의로 기소중지된 상태이다. 그는 5년 간의 총재 임기가 끝내고 지난 7월31일 귀국했다. 그의 혐의 가운데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것은 공갈미수 혐의뿐이다. 검찰은 이를 조사하기 위해 곧 그를 소환할 예정이다.
《시사저널》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그와 피해자측인 尹錫民·윤석조 형제의 주장을 들었다. 피해자측은 측근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대한선주 회장이었던 윤석민씨는 정리 의혹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횡령과 외화도피 혐의로 현재 잠적한 상태다 88~89년 열렸던 국회 재무위 국정조사와 5공비리특위의 조사 자료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됐다.
정인용씨는 검찰의 소환 방침이 알려진 8월4일 거듭된 기자의 질문에 담담하고 소상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그는 특히 자기가 아시아개발은행 총재로 취임한 것이 ‘도피성 출국’을 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시각에 대해 곤혹스러워했다. 그는 “국제 기구의 총재로 근무하는 사람에게 1주일 안에 귀국해 증언하라는 요구는 지나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전화로 증언 거부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국회에 양해를 구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쪽이라고 밝힐 수 없다”라고 말해 6공화국 고위층과 증언 거부에 대해 어느 정도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양쪽의 주장을 통해 대한선주 정리 과정상의 의혹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했다.
84년 7월
대한선주 정리 과정이 정치적 사건이었느냐 아니냐를 밝힐 수 있는 일들은 이
시기에 벌어졌다. 국세청(당시 청장 安武赫)이 돌연 대한선주에 대해 세무사찰을 실시한 것이다. 이 회사는 해운업체로는 최초로 이미 8개월전에
세무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어서 의혹이 더욱 증폭됐다. 피해자측은 이 세무사찰이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해자측이 정권에 ‘미운 털이 박히게 된’ 계기라고 주장하는 사건은 세가지. 우선 84년초부터 5월까지 이루어진 제1차 해운사업합리화 조처에 대해 이 회사는 반대했었다. 같은해 6월에는 丁來赫 민정당 대표위원 부정축재와 관련한 투서사건이 터졌다. 투서한 사람은 安亭泰씨. 대한선주 최대 주주이자 사장인 尹錫祖씨(후에 이름의 끝자를 祚로 바꾸었다)의 장인이었다. 피해자측은 정치자금 상납금을 게을리했다는 점도 꼽는다. 89년 3월에 열린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윤석조씨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국회 망년회 석상에서 ‘돈을 벌면 정치 자금도 많이 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거부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86년 10월
이 해 8월 대한선주의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은 관리단을 보내 회사를 실사했다.
실사에 대해서도 양쪽 주장이 엇갈린다. 정 전장관은 윤씨 형제가 1백50억원~2백억원만 있으면 부실채권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해 실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사 결과 4천억원~5천억원 정도가 잘못돼 있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반면 피해자측은 정부가 대한선주를 제3자에게 인수시킬
것을 미리 결정한 상태에서 실사작업을 진행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총부채가 과대평가됐다는 것이다.
두 달 후쯤 윤석민 대한선주 회장은 정인용 장관과 만났다(세무사찰 후 윤석조 사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전권을 형인 윤석민씨에게 넘겼고, 韓相權씨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정씨에게 남아 있는 공갈미수 혐의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때의 면담 내용이다. 피해자측에 따르면 정 전장관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금융을 끊겠다” “대통령의 결심 사항이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기업이 있느냐”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 전장관의 말은 다르다. “그 양반이 만나자고 사무실로 찾아 왔길래 만났다. 그래서 은행이 부도내겠다고 나서는데 잘 협조해서 매듭짓자고 했다. 윤회장에게는 ‘당신은 능력 있는 분이니 중소기업이라도 해서 다시 일어서면 되지 않느냐’고 말해줬다. 마지막에는 그가 나보고 ‘회사라도 살려줘서 고맙다’고까지 했다.”
공갈미수 혐의와 관련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시 장관실 모임에 배석했던 사람의 기록이다. 정씨는 부실기업 정리를 주도하면서 훗날 오해를 살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기업주를 만나는 자리에 항상 재무부 인사를 배석시켜 기록을 남겨두게 했다고 했다. 윤회장과 만날 일에 대한 기록이 재무부 어디엔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87년 3월
대한선주와 외환은행, 대한선주에 대출해 준 10개 은행이 문제의 가계약을 체결한
시기다.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86년 11월께부터 87년 3월20일까지 정부와 외환은행 대한선주를 인수할 대상을
물색했다. 이 단계 전부터 인수 업체를 한진해운으로 미리 결정해놨다는 것이 피해자측 주장이다. 범양상선과 현대상선 같은 경쟁사들은 부실화했거나
재벌 그룹 계열사라는 이유로 일찌감치 배제돼 있었다. 외환은행측은 1순위로 포항제철을 지목했지만, 선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대한선주의 제3자 인수방침이 확고해진 것은 정부가 제2차 해운산업합리화 조처를 발표한 2월16일께이다. 대한선주는 지원대상 업체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3월24일 정인용 당시 재무부장관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대한선주 정리방안’을 보고했다. 이 때 대통령이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느냐가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정씨는 “이 날 최종적인 보고를 포함해 몇번 보고할 때 ‘이 회사를 죽여’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걸 단 한반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에도 더 정확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이 당시 대한선주 계열사인 서주산업은 대한선주 주식의 85.1%를 담보로 잡히고 10개 은행으로부터 4백50억원 가량의 돈을 빌려 쓰고 있었다. 3월31일에는 드디어 10개 은행이 담보로 잡은 주식을 외환은행에 인도하고, 외환은행은 이를 한진해운에 넘기기로 가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경영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윤석조·윤석민 형제의 동의나 날인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환은행은 회사측이 관례상 주거래은행에 맡겨놓은 대표이사의 도장을 먼저 찍고, 후에 한상권 사장에게 구두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대한선주측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졌으나 91년 10월 5년 가까이 끈 민사소송을 기각당해 1차 ‘판정패’ 당했다.
같은해 5월 초에는 각 금융기관으로부터 6일 안에 대출금을 상환하라는 최고장이 대한선주에 동시에 날아들었다. 피해자측은 이것이 아직 상환기일이 되지도 않은 대출금에 대한 담보권을 행사하기 위한 편법적인 조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5월12일 각 은행은 담보로 잡은 대한선주 주식 72.5%를 외환은행에 넘겼고, 윤석민 대한선주 회장은 6월30일 열린 임시 주주총회에서 쫓겨났다. 12월에는 드디어 본계약이 체결돼 정상을 다투던 해운업체 대한선주는 한진그룹에 완전히 넘어갔다.
대한선주가 국제그룹 같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려면 우선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는 대한선주 정리 과정의
적법성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국제그룹과 대한선주가 다른 점이 있다면 피해자측이 정리 과정을 주도한 관료를 고소했다는 점이다.
피해자측은 이를 통해 단순한 원상 회복뿐만 아니라 ‘무능한 경영자’였다는 낙인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미 정리된 많은 부실 기업 소유주들이
이를 위해서라도 대한선주의 예를 따를지 모른다.
金芳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