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요청은 북측의 계산된 제의…‘북한 고립’ 빗장 풀 새 열쇠 기대
미·북한간 제2단계 제네바 회담에서 북한 대표가 경수용 원자로 문제를 거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일부 언론은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떤 매체는 회담의 마무리 단계에 북한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와 미국에 생떼를 쓰고 있는 양 표현하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이 문제가 회담 막바지에 돌출해 미국 대표가 크게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북한 간의 회담에서 경수로 기술에 대한 문제는 국내 언론이 보도한 바와 같이 제네바 회담에서 돌출한 사안은 아니다. 지난 7월15일자 《시사저널》이 보도한 대로 이 문제는 이미 지난 6월12일 뉴욕에서 열린 미·북한간 제1단계 3차 회담 석상에서 북한 대표가 제기한 사안이다. 따라서 제네바 회담에서 이 문제가 갑자기 나와 회담이 난관에 봉착한 듯이 묘사한 국내 언론의 보도는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당시 이 문제를 둘러싼 제네바 회담의 분위기도 국내 언론이 보도한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한반도 핵 문제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오스트레일리아의 피터 헤이즈씨가 《시사저널》에 보내온 양측 대표의 대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북한 대표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7월16일로, 14일부터 시작된 제네바 회담의 현안 토론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던 시점이었다. 북한 대표는 미국 대표에게 “매우 새롭고 대담한 제안(a brand new bold idea)을 하겠다”라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다음은 피터 헤이즈가 미국 정부 소식통을 통해 입수한 당시 회담 내용을 양측 대표의 발언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북한 대표 : 북한 핵 문제의 근원은 북한이 외부 세계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낮은 기술 수준으로도 가능한 흑연감속로형 원자로 방식을 채택했던 데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 방법은 북한이 기존의 흑연감속로형 원자로 대신 경수로형 원자로를 채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대표 : (즉각적으로)동의한다. 북한이 핵안전협정과 관련한 시급한 현안을 해결한다면 미국은 북한이 경수로 기술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기꺼이 찾아보겠다. 그러나 북한측이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원자로는 미국정부가 아니라 민간 기업들이 판매한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이 기업들에 대한 자금 지급 방법을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다.
북한 대표 : 경수로 기술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미신고 시설에 대한 접근 문제를 포함해 핵안전협정을 점진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우리도 알고 있다.
미국 대표 : 이 문제와 관련한 실질적인 토론은 북한이 핵안전협정에 동의한 후에 이루어질 수 있다.
미국측이 제시한 조선 충족 가능할 듯
이같은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미국은 경수로 기술에 대한 북한의 지원 요구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단지 이러한 문제가 실질적으로 토의되기 위해서는 조건의 성숙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갈루치 차관보가 7월19일 기자회견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 정부 내에서 기술지원과 관련한 법적·재정적 문제가 수반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일부 언론이 지적한 것처럼 경수로 기술 이전 자체가 미·북한 회담의 걸림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미국이 북한의 요구 사항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해서 경수로 기술 이전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과정에서 제기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조건의 성숙과 관련해 미국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북한이 그동안 중단됐던 국제원자력기구와의 국제사찰 문제, 그리고 남북한 간의 상호핵사찰 문제 등에 대해 앞으로 2개월 내에 성의있는 자세를 표명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못박고 있다.
그런데 지난 7월20일자 연합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측이 요구하고 있는 이러한 조건이 성숙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합통신은 정부 고위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이 날 보도에서 ‘미국과 북한 간에는 북한이 어떠한 형태로든 핵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막후 합의가 있었으며,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정부는 북한의 체면을 고려해 이 합의 내용을 공동성명에는 싣지 않기로 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이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어렵지 않게 충족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이후에는 결국 미국이 국교가 수립돼 있지 않은 북한과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법적 절차와 재정 문제가 남게 된다. 법적인 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대공산권 수출통제위원회(코콤)의 규정 및 적성국가와의 교역을 제한하고 있는 국내법 규정 등으로 인해 북한과의 직접 교섭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 때문에 미국은 현재 남북한 간의 대화 통로나 북한·러시아 간의 통로를 이용해 북한이 이 문제를 제기해 오면 미국이 뒤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터 헤이즈씨는 미국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정부는 북한이 이 문제를 남한과의 통로나 러시아와의 통로를 통해 제기해 오는 것이 더 적절한 방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남북한 간에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핵통제위원회 및 경제교류위원회 내의 과학기술교류 협정 등이 있기 때문에 북한이 이런 통로를 이용해 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북한은 85년 옛 소련과 ‘북한의 원자력 건설과 관련한 각서’를 체결한 바 있고, 무산되기는 했지만 옛 소련이 경수용 원자력 발전소 4기를 신포에 건설해 주기로 합의한 바도 있다.
헤이즈씨는 “미국 정부는 북한이 두 개의 통로 중 어떤 것을 택하든 결국에는 미국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즉 남북한 간의 경수용 기술지원 문제가 합의된다 해도, 한국이 소유하고 있는 기술의 대부분은 미국이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동의나 지지가 있어야 북한에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 또 러시아와 북한은 양국 모두 재정적인 능력이 없어 미국이나 한국 정부가 자금지원에 대한 보증을 해 주어야 한다. 어떤 경로를 취하든 미국의 지지나 동의가 필수적인 상황이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미국이 직접하든 그렇지 않든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라고 지적했다.
“경수로는 미국 성문 부수는 쇠망치”
국내 전문가들은 절차 문제 외에도 북한이 필요로 하는 원자로 규모에 맞는 기술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한국 기술진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전력공사 원자력발전처 이주상 부장은 “현재 북한이 필요로 하는 원자력 발전소 규모는 대개 30~60만kW급이다. 미국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규모는 이미 낙후한 기술이다. 원자로 크기가 비슷한 한국 기업들이 기술지원에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법적·기술적·재정적 문제 등을 고려할 때 북한에 대한 경수용 원자로 지원은 “미국·북한·한국·일본이 참여하는 4자 컨소시엄이나 일본이 제외된 3자 컨소시엄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재원은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고, 세계은행(IBRD)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차관을 제공하는 방식이면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런 과정에서, 북한의 체제 변화를 유도하고 통일 이후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정부가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수용 원자로 건설 문제는 국제적인 컨소시엄이 결성된다 해도 짧은 시일에 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대개 원자로 1기를 건설하는데 설계 단계에서부터 10~15년 정도를 잡는게 일반적인 관례이다.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을 북한 당국자들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선 데에는 경수용 원자로 자체에 못지 않게 그것을 짓기 위한 국제적인 협의 과정에서 북한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북한이 그동안 건설을 추진해왔던 흑연감속로형 원자로가 핵무기 개발용과 발전용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듯이, 북한의 경수로 기술 이전 제안도 다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산업적 필요성 외에 경수로 제안이 현재 북한에 가지는 의미는 그것이 곧 북한과 미국, 북한과 국제 사회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헤이즈씨는 “경수용 원자로는 미국이라는 닫혀 있는 성문을 깨부수는 쇠망치(battering ram)이다”라고 말했다. 경수용 원자로 기술 이전을 둘러싼 협의 과정에서 미국의 문호가 개방되면 남북 간의 경제 협력 교류 및 북한·일본 간의 국교정상화 문제에도 가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게 된다.
또 경수용 원자로는 한국이나 미국 등 서방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 체제 변화를 이끌어 낼 ‘트로이의 목마’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해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흑염감속로형과 달리 경수용 원자로는 북한에서 자급할 수 없는 농축 우라늄을 사용한다. 경수용 원자로가 북한의 핵 투명성을 보장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전문가들의 주장은 바로 이 농축 우라늄의 국제적 이동 과정이 철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근거한다. 북한은 앞으로 에너지 수급정책의 핵심이 될 원자로의 핵연료를 외부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방 세계의 입장에서 이것은 곧 북한의 닫혀진 빗장을 걷어낼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는 사실이다.
南文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