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필드>와 <미션>을 감독한 롤랑 조페의 영화에는 언제나 소수의 백인과 다수의 원주민이 등장한다. 이
때 주인공은 소수인 백인이 맡는데, 드라마를 효과 있게 전개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백인은 부유하고 유식하며 힘이 있는 반면,
원주민은 가난하고 무지하며 아무런 힘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엔 소 닭 보듯이 서로 피하다가 대결-갈등-화해의 수순을 밟는다.
<시티 오브 조이>도 마찬가지이다. 부러울 것 없는 미국인 의사 맥스(패트릭 스웨이즈)가 자기 환자였던 소녀를 구하지
못하자 무력감에 빠져 인도를 찾는다. 맥스는 인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매춘을 강요받고 사기를 당하면서 극빈의 인도(인) 앞에서 절망감을
느낀다. 특히 ‘기쁨의 도시(시티 오브 조이)’라는 역설적인 이름을 가진 빈민가에서 만난 인력거꾼 하사리 일가의 끔찍한 가난 앞에서는 그만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맥스는 가난 속에서도 인간애를 잃지 않고 가슴 속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하사리와 간이진료소를 운영하는 아일랜드
여성 조엔을 만나 자극과 용기를 얻는다.
이 영화에서 맥스는 자기의 의학 지식을 기쁨의 도시 주민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그들로부터는 삶의 지혜를 얻는다. 따라서 맥스와
기쁨의 도시 주민을 대표하는 하사리와의 관계는 인종과 계급을 초월하여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이룩하고 있다.
<기쁨의 도시>에서 보여주는 관대함, 인내와 용기, 희망을 잃지 않는 굳센 의지는 인생의 필수 덕목이므로 아무도 이
영화에서 메시지에 시비를 걸 수 없다. 하지만 롤랑 조페 감독은 <킬링 필드>나 <미션>처럼 <시티 오브
조이>도 상투적인 구성에 의존함으로써 감동조차 상투적으로 만드는 약점을 감추지 못했다.
맥스가 인도로 오기까지의 도입부가 그렇고, 암흑가의 망나니가 변심한 창녀의 입을 면도칼로 찢는 소름끼치는 묘사가 그렇다. 또
하사리 딸의 혼례식날, 칼에 찔려 꿰맸던 부위가 피가 흥건하게 배어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도 표현의 절제가 아쉬웠다. 이런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이 영화를 명작의 수준으로 밀어올리는 데 방해가 된다. 박진감 넘치는 군중 신, 치밀하고도 방대한 세트로 일대 장관을
이룬 장면의 성과가 뛰어난 만큼 이런 아쉬움은 더하다.
하사리 역을 해낸 옴 푸리의 뛰어난 연기는, 패트릭 스웨이지보다 더 뛰어난 연기자가 맥스 역을 맡았더라면 <시티 오브
조이>의 평점이 훨씬 높아졌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역경에서도 고상한 선택을 한 사람을 찬미하려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상당 부분 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위야 어찌됐든 ‘남 위해 내 터럭 하나 다치고 싶지 않은’ 요즘 세상,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이 영화는 볼 만하다. 李世龍 (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