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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포크의 시대를 열었던 ‘청개구리’가 ‘포크의 전설’로 불리는 그가 있어 가능했다.

 
<마지막 여름장미> <매기> <은발> <애니 로리>... 어릴 시절 음악 시간이면 누구나 한번씩은 흥얼거려 보았을 이런 민요풍 노래들을 ‘포크 송(Folk Song)’이라고 부른다. 나라와 민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고유의 포크 송이 존재했다. 때로는 예술 가곡의 수준까지, 때로는 대중 음악에 근접한 순박함을 띠며 민중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품어온 포크. 20세기 들어 신대륙 미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모던 포크’가 탄생해 정치적인 성격까지 띠게 되었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활동한 존 바에즈·밥 딜런이 이 부류이다.

1970년 6월29일 서울 YWCA 회관. 방의경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윤형주 등 군부 독재의 억압 아래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은 음악 모임 ‘청개구리’를 만들어 첫 콘서트를 열었다. 외국의 번안곡을 주로 부르던 ‘청개구리’는 곧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포크 계열의 창작곡을 발표하면서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긋기에 이른다. 트로트·발라드·록이 주류를 이루던 음악계에 우리 정서가 가득 밴 우리 음악을 하는 ‘청개구리’는 당시 그들만의 문화계층을 이루었다. 하지만 정부기관의 감시와 일부 가수들의 제도권 편입으로 ‘청개구리’는 1년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결성되자 마자 해체된 포크그룹 '청개구리'

지난 10월22일 저녁, 고양 덕양어울림누리 별모래극장. 무대 위에는 가을 낙엽이 소복하게 깔려 있고 억새풀이 갖가지 조명을 받아 나풀거렸다. ‘홀로 거니는 쓸쓸한 이 밤에 /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나 / 소식 한 번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 뿐이네...’ 김의철이 작사 작곡한 <연인들>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클래식 기타의 아늑한 분산 화음이 바이올린과 첼로의 흐느낌을 감싸안고, 거기에 인간의 목소리가 절절한 사랑을 읊었다. 자극적인 악기는 일체 배제되고 오로지 어쿠스틱한 도구와 인성만이 살아 숨쉬는 시간. 곡의 막바지에 이르자 앞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타령조 선율과 리듬이 절묘한 노래로 다시 포장되어 연주되자 객석은 박수마저 잊은 채 적막감에 휩싸였다. ‘가을, 마음의 산책’ 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 공연은 사라져버린 우리의 포크 음악을 되살리기 위해 시작된 ‘청개구리’의 올해 다섯 번째 무대였다. ‘청개구리 지킴이’ 자격으로 참여한 김민정씨(35)의 노래는 프로의 완숙함은 아니었지만 아마추어의 풋풋한 정서가 청중의 가슴으로 진하게 전해졌다. 2003년 7월20일, 33년 만에 ‘청개구리’는 다시 모였다. 예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명동 YWCA에서 방의경 콘서트를 시작으로, 이들은 클래식도 대중 음악도 외국 것이 최고인 줄 아는 음악계에 작지만 힘 있는 도전장을 던졌다. 음악을 떠나 각자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던 가수들이 ‘용감하게’ 하나 둘 제자리로 돌아왔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로 시작하는 <얼굴>을 처음 불렀던 윤연선, <세노야>의 김광희, 1970년대 인기를 구가했던 여성 듀엣 ‘현경과 영애’의 박영애가 합세했다. 어디 이뿐이랴. 김두수 이성원 이정선 오세은 손현숙 등 쟁쟁한 포크의 거장들이 손을 잡았으며, 김소희 명창의 딸인 소리꾼 김소현은 ‘김정호 추모 콘서트’에서 <님>을 절절한 우리 창법으로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기적과도 같은 포크의 부활은 ‘포크의 전설’로 불리는 김의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의철, 그는 누굴까?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의철은 1973년 고등학교 시절에 작곡했던 <저 하늘의 구름 따라> <마지막 교정>이 담긴 <김의철 노래모음>을 끝으로 공식적인 음반을 발매하지 않고 음악계를 떠났다. 거의 모든 곡이 유신 정권의 검열에 걸려 당국의 조사를 받아야 했던 그때 조국은 그에게 더 이상 활동 무대가 될 수 없었다. 독일로, 미국으로, 그는 기타 소리를 살찌울 수 있는 곳을 찾아 길을 떠났다. 국내 클래식 기타의 ‘유학 1호’인 김의철은 독일에서 기타의 거장 나바스코스에게 사사했고, 다시 뉴욕으로 떠나 세고비아의 수제자 볼로틴이 가장 아끼는 학생이 되었다.

가수 양희은 “나의 음악 스승 중 으뜸”

‘미국 기타 학교’ 교수 직이라는 탄탄대로를 버리고 귀국을 서두른 김의철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 포크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애초에 모든 노래를 클래식 기타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김의철의 음악은 ‘클래식 포크’라는 유례 없이 독특한 장르였다. 대표곡을 고등학교 때 작곡할 만큼 음악에 천재성을 보인 김의철은 미국식의 단순한 포크에 클래식의 윤기를 덧입히고 여기에 우리 가락을 심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의 연가곡은 애초에 기타로 반주하게끔 되어 있다. 김의철이 1993년에 비공식 발표한 <연가집>은 클래식 기타 위에 소프라노 양경숙의 음성이 펼쳐지는데, 슈베르트의 예술 가곡에 견줄 만한 놀라운 음악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모든 노래는 극히 ‘한국적’이다. 윤이상의 음악이 왜 세계적인가. 서양 악기를 통해 우리 음악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김의철의 포크도 외국 냄새가 전혀 나지 않기에 극히 높은 예술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양희은은 김의철을 통해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 5년 동안 잃어버린 양희은의 목소리를 소생시켜 2001년 데뷔 30주년 기념 음악회를 가능하게 한 것도 김의철의 노고였다. 양희은은 ‘살면서 만난 음악 스승 중 으뜸’이라고 김의철을 평가한다. 김의철은 이렇듯 언제나 뒤에서 소리 없이 포크인들을 도왔다. 11월21일, 25년 전부터 포크 음악인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일산의 음악 카페 ‘숲속의 섬’ 벽난로가에서 김의철을 만났다. 나이 쉰을 훌쩍 넘긴 지금, ‘청개구리’ 살림을 위해 서울의 집을 팔고 파주의 조그마한 빌라에 둥지를 튼 그의 얼굴에 세상살이의 굴곡이 스쳤다.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음악이 포크입니다. 저는 우리 것을 살리고 싶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눈동자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사실 일제시대 독립군이 부르던 노래 이후 우리 민족의 포크는 사라져 버렸어요”라고 함께 자리한 ‘청개구리’의 기획 담당인 이정오 시인은 한탄했다. 클래식계도 45만원짜리 티켓을 파는 공연이 최고인 줄 알고 외형적인 것에 환호작약하고 있는 이때에 ‘청개구리’는 자신의 지갑을 털어가며 ‘우리 포크’를 살리기 위해 외길을 가고 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국가나 기업의 문화 재단은 이제부터라도 ‘외국 음악’이 아닌 ‘우리 음악’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둘 때다.

덕양어울림누리는 클래식 공연장이지만 ‘청개구리’에 과감히 자체 기획 공연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12월17일, 올해의 마지막 ‘청개구리’ 콘서트가 열린다. 세상의 때로 얼룩진 우리의 영혼을 다독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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