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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여중 교감 자살 사건 전모/유족 “강자인 교장·교육청이 목 죄었다”

 
충북 옥천 ㅇ여자중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ㅅ씨는 지난 5월24일 5교시 수업이 끝난 직후 “관악부 학생들은 자기 악기를 들고 본관 앞 잔디밭으로 내려오라”는 학교 방송이 나오는 것을 들었다. 이날 관악부 학생 30여명은 충북도교육감과 교육청 관계자들을 위해 40분 가까이 연주를 계속했다. 관악부 학생들은 6교시 수업을 받지 못했고, 다른 학생들은 시끄러운 가운데 수업을 받아야 했다.

‘교육감에 대한 과잉 영접’ 논란에서 시작되어 교감 김 아무개씨 자살로까지 이어진 ‘충북 ㅇ여중 사건’의 시작은 이랬다. 이 사건은 교육계 내부의 뿌리 깊은 권위주의 문화와 교육 당국에 만연한 행정중심주의 사고 행태, 그리고 일선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교사들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35년간 교단에 서온 한 교사를 결국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 사건은 학교의 위기는 학생들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충북 옥천교육청 관계자는 “26년 만에 충청북도에서 열리는 제34회 전국소년체전 개막식 행사의 연주를 ㅇ여중 관악부가 맡게 되었기 때문에 격려차 교육감이 방문했던 것이다. 관악부 학생들을 격려하고 사진을 찍은 뒤 교장실에서 차 한잔 한 것이 전부였다”라며 사건이 확대된 것을 곤혹스러워했다.

시작은 이처럼 단순했지만 후폭풍이 거세지면서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 중심에 ㅇ여중 교장이 있었다. 교육감이 이 학교를 방문한 시간은 10여 분에 불과했지만 그가 화장실에 들른 우연한 행위가 ‘사건’을 잉태했다. 교육감이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는데 닦을 수건이 걸려 있지 않아 자기 손수건을 꺼내 닦은 것이다. 그냥 흘려버려도 아무 문제가 안 되었을 이 일을 ㅇ여중 교장이 키웠다.

교육감이 다녀간 직후 교장실에 결재를 받으러 갔던 한 학교 관계자는 혼쭐이 났다. 교사들 사이에 이 일이 알려지면서 ‘왜 교장의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궁금증은 며칠 뒤 사건이 표면화한 뒤에야 풀렸다. 교육감이 들른 화장실이 제대로 청소되어 있지 않았고, ‘수건 사건’ 때문에 교장이 화가 났었다는 것이었다.

교장, 평상시에도 교감에게 모멸감 줘

교육감이 다녀간 다음날인 5월25일 교장정 아무개씨는 전날 일과 관련해 교감 김씨를 질책했다. 정년을 1년 남겨 놓은 교감 김씨는 지난해 9월1일부터, 교장은 그 1년 전부터 ㅇ여중에 근무해 왔다. 교감이 교장보다 열두 살이 많다. 질책의 강도와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직원회의가 있는 5월26일, 회의를 주재해야 할 교감은 예정에 없던 병가를 내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유족에 따르면, 교감은 이 날 절친한 친구와 집 근처에 있는 대전 보문산을 2시간 30분 동안 등산하면서 나이 어린 교장으로부터 그 동안 어떤 대접을 받아왔는지 털어놓았다. 친구는 “정년도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한번 뒤집어버려!”라며 교감을 격려했지만, 온화한 성격인 교감 김씨는 “그래도 내가 참아야지”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교장은 “교감과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비친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ㅇ여중 교사들은 교장이 공개석상에서 교감에게 시험 문제의 답을 맞춰보라고 하는 등 교감이 모멸감을 느낄 행동을 여러 차례 했다고 증언했다.

뜻하지 않은 계기를 통해 사건은 점점 커져갔다. 평소 맥주 한 상자를 마셔도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던 교감 김씨는 ㅇ여중 절친한 동료 교사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교육감이 방문했을 때 일을 이야기하며 교장에 대한 서운함을 내비쳤다. 김씨의 말을 들은 동료 교사는 이 사실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인 또 다른 동료 교사 조 아무개씨에게 알렸고, 조씨는 5월30일 오후 5시26분, ‘교육감 대왕님 학교에 납시다’라는 제목으로 지역 신문인 <옥천신문>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교육감의 학교 방문 당시 일어난 일과 ‘수건 사건’ 때문에 교장이 교감을 질책한 일 등을 적나라하게 적은 것이다. 조씨는 ‘옥천문정골’이라는 가명을 썼다.

다음날인 5월31일 오후 4시 교직원 회의를 소집한 교장 정씨는 조씨의 글이 과장되었다고 반박하며 “인터넷에 올린 글을 내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씨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조씨는 “교장이 사과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아직 멀었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조씨가 전교조 소속이라는 점을 들어 일부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전교조와 교장과의 대결 구도로 보도했다. 전교조가 학교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드러내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ㅇ여중 전교조 교사들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것도 조씨가 글을 올린 이후다. ㅇ여중 전교조 소속 한 교사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5월31일 조씨의 집으로 찾아간 교감 김씨가 글을 내리자고 설득했으나, 조씨는 “교장이 사과한 것도 아닌데 내릴 수 없다. 그러면 글을 올린 의미가 없다”라며 교감의 손을 잡고 울었다. 평소 조씨와 교감 김씨는 관계가 좋았다. 하지만 6월1일과 2일을 거치며 사태는 진정되는 듯했다.

6월1일 전교조 충북도지부 오황균 지부장 등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ㅇ여중에 가 교장을 만났다. 교장 정씨가 시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양측은 덕담을 주고받았다. 오지부장은 교장에 이어 교사들과 만나 “자체 해결해도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6월2일 ㅇ여중 전교조 분회 모임이 열렸다. 교사 12명(이 학교 전체 교사는 38명이다)이 참석했다. 분회 모임에서 교사 다수는 조용한 해결을 원했다. 전교조 충북도지부 홈페이지에 톱뉴스로 올라 있는 관련 내용도 내리기로 했다. 교장 정씨와 만난 조씨도 ‘잘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경위서 제출 요구로 사태 급변

그러나 밤이 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교감 김씨에게 경위서를 쓰라고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소식을 들은 교사 조씨는 교장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 교장은 옥천군교육장의 전화번호를 조씨에게 알려주었다. 조씨는 교육장에게 전화를 걸어 “만약 교감이 해를 입으면 2탄을 터뜨린다”라며 경위서 등을 요구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6월3일 지역 신문인 주간 <옥천신문>이 이 사건을 2면에 걸쳐 보도하면서 사건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전환했다. 조씨의 글 전문이 게재된 신문 보도를 보고 회의를 소집한 교장은 조씨 글의 허점을 지적하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흥분한 상태에서 회의장을 나갔다. 6월4일 교장 정씨는 체육부·관악부 교사 등 교육감 방문과 관련된 교사들에게 사실확인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이들 교사들은 사실확인서를 썼다.

 
조씨는 이 날 옥천교육장을 만나 “자체적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왜 경위서와 사실확인서를 요구하느냐”라고 따졌다. 직원회의에서 교감 김씨는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건재해서 우리를 지켜주셨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김씨에게 보냈다. 김씨는 시가 쓰여 있는 답장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교감 김씨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현충일인 6월6일 오전 5시쯤 자기가 살고 있는 대전시 동구 인동의 아파트 13층에서 몸을 날렸다. 전날 부인과 함께 보문산을 등산한 김씨는 내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김씨의 딸 김 아무개씨(29)는 “빈소에 온 학교 관계자가 물어본 첫 얘기가 ‘유서에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교육청 요구대로 다 말하면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 같고, 교장은 서운하다고 말하고, 전교조는 글을 삭제해 달라고 했는데 안 되었다. 탈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아빠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빠는 약자고 교장과 교육장은 강자였다”라며 울먹였다.

6월10일 현재 ㅇ여중 홈페이지에는 교감 김씨를 추모하며 교장과 교육 당국을 비판하는 글이 수백 건 올라 있다. 조회 수도 보통 수백 회가 넘는다. ㅇ여중 3학년 이소희양은 실명으로 글을 올려 ‘교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교감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 것인가. 잡심부름이나 시키고. 교장 직에서 물러나라’고 주장했다.

6월8일 장지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ㅇ여중에 들른 교감 김씨를 맞은 학교는 쓸쓸했다. 학교측은 학생들에게 수업을 계속하도록 했고, 밖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했다. 학생들이 가져온 하얀 국화꽃은 일괄적으로 걷어서 김씨가 쓰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35년을 교직에 헌신한 한 교육자를 보내는 교육계의 마지막 모습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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