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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안녕, 프란체스카>, 상상 불허하는 설정과 캐릭터 조화시켜 ‘대박’
시트콤 전성시대 부활 알리는 신호탄!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가 주인공이라는 설정도 심상치 않았는데, 멸문지족(滅門之族)의 재앙을 피해 루마니아에서 한국으로 숨어든 이들이 벌이는 행각은 인간의 허를 찌르며 시청자의 ‘웃음’을 ‘피’처럼 빨아 마신다. 그리고 이들 뱀파이어들에게 웃음을 빨린 시청자들은 일명 ‘프란체 폐인’이 되어 뱀파이어의 웃음 축제에 기꺼이 동참한다. 상상 불허의 캐릭터와 상황 설정만은 아닌, <안녕, 프란체스카>가 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진짜 힘은 무엇일까? 지난 4월25일로 1부 24화가 마무리된 <안녕, 프란체스카>는 2천살인 왕고모 소피아(박슬기 분), 5백살인 프란체스카(심혜진 분)와 엘리자베스(정려원 분), 2백살인 켠(이켠 분)이라는 뱀파이어들이 프란체스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 인간 이두일(이두일 분)과 의사(?似)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두일과 프란체스카가 부부 행세를 하고 소피아와 켠은 이들의 자식 역을,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프란체스카의 동생 역을 맡아 이두일과는 ‘처제-형부’ 관계가 된다. 이렇게 구성된 의사(?似) 가족은 주로 ‘매스컴’을 비틀면서 시청자의 웃음을 빨아 마신다. 현대 사회에서 매스컴, 특히 방송 매체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는 아무리 소리 높여 시청자 주권을 외치더라도 방송 매체의 혁신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업계에 몸 담고 있는 시트콤에서 ‘방송’을 비꼬다니, 어느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프란체스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 이두일이 텔레비전 영화에서 본 방식대로 자살하기 위해 암막 커튼을 열어 제치는 것을 본 프란체스카는 “암튼 텔레비전이 애들 다 망쳐 놓는다니까”라며 혀를 찬다. 텔레비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 세상은 뱀파이어 일족이 보는 낡은 텔레비전만큼 너무나 초라하다. <안녕, 프란체스카>가 텔레비전을 ‘씹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화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방송 매체를 비틀기 시작한 <안녕, 프란체스카>는 등장 인물을 12각 관계로 엮으면서 드라마를 풍자하는 방식으로 텔레비전의 주요 프로그램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상식과 관습은 모두 무너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름에 빠진 부인 프란체스카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가장 이두일,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되었던 성(性) 체계를 무너뜨리는 켠, 나이가 가장 많은 왕고모지만 외모는 가장 어려 보이는 소피아, 카리스마 넘쳐야 할 앙드레 대교주의 초라한 모습 등을 통해 우리가 애써 상식이라 믿었던, 혹은 관습적으로 행동했던 모든 것들의 경계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시청자는 전복의 쾌감을 느끼면서 뱀파이어들에게 ‘피’ 대신 ‘웃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안녕, 프란체스카>의 웃음이 웃음 그 자체로 끝났다면, 아마도 ‘프란체 폐인’은 양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청자들이 ‘웃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뱀파이어들에게 ‘웃음을 빼앗긴다’는 것에서 다른 시트콤과 구분되는 <안녕, 프란체스카>만의 독특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안녕, 프란체스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웃는다. 웃음의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는 순간, 그 웃음은 슬픔으로 전이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반성과 자각’을 이끌어내는 ‘슬픈 웃음’이 바로 프란체 폐인을 양산하는 힘이다. 자본이 자본을 키우고 노동은 노동을 불러올 뿐인 현실에서 점차 더 심각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의 해법을 찾지 못하는 사이, <안녕, 프란체스카>는 시청자의 웃음을 더 강하게 빨아 마신다. 어쩔 수 없이 뱀파이어들과 동거하면서 착취당하는 이두일에게서 불안정한 고용 시장에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어쩌면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