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영재들 자살 잇따라…성적 격차·일률적 협동생활 등 엄청난 압박감
4월12일 공주시 ㅎ고등학교 매점 청소를 하는 박재화씨(64)는 새벽 4시 반쯤 학교에 출근하다가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학교 입구에서
승용차 한 대가 활활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박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은 차 속에서 시체 3구를 발견했다.
ㅎ고교 상담실장인 최용희 교사는 “아침에 사고 소식을 듣고 직감적으로 이 아무개군(18·3학년)이 떠올라
다리가 후들거렸다”라고 말했다. 사고 전날 밤 9시 이군의 가족이 학교를 찾아와 교장과 상담을 했다. 가족은 학교가 이군의 정신 이상 증세를
지적하며 전학을 요구하자 크게 낙담하고 돌아갔다. 아침에 발견된 어른 시체는 이군의 부모 것이 맞았다. 나머지 하나는 이군의
여동생(15)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차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집에서 유서가 발견되어 자살로 추정 된다”라고 말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군은
미리 차를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다.
기숙사
생활 하면서 친구들과 균열
요즘 ‘똑똑이’ 자녀를
둔 학부모들 마음이 편치 않다. 공주 ㅎ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신입생 모집을 하는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인데 최근 5년 사이 갑자기 ‘뜨고’ 있는
신흥 명문이었다. 한 교사는 “지난 모의고사 성적에서 민족사관학교를 꺾었다”라며 자부심을 보였다. 교정에는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 학부 입학자
현황이 적힌 플래카드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런 명문고에 일진회 같은 폭력 서클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4월10일에는 ㅅ과학고 학생회장이
자살하기도 했다. 이른바 ‘헤르만헤세 증후군’(상자 기사 참조)가 퍼지고 있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초기에 ㅎ고 학부모 가족 자살은 ‘정신 이상 아들’을 둔 아버지의 낙심 탓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음날 아버지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상황이 반전했다. 유서 9장 가운데 5장은 청와대·교육부와 충남교육청 등에 보내는 탄원서였다. 자기 자식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학교 폭력의 희생자인데 학교가 제대로 조처하지 않고 있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흥분한 친척들은 4월14일 고인들의 시신이 든 관 3개를 학교
교정으로 운구하고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4월20일 유일한 생존자 이군은 작은아버지와 함께 학교 기숙사를
찾아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언론에서 애를 무슨 정신병자처럼 묘사했는데 어이가 없다. 아이는 정상이다. 병원에서 MRI 촬영까지
하면서 종합 검진을 했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라고 역설했다. 다만 유족들은 “학교측과 합의한 게 있어서 학내 폭력 문제는 제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군의 주변 정황을 묘사할 때 가장
뜨겁고 민감한 단어는 ‘정신 이상’이다. 유족과 무엇인가를 합의한 학교측은 “이군의 증세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군의 장래와 명예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취재를 피했다. 학교 주변과 학생들을 비공식으로 취재한 결과 이군은 시험 도중 뛰쳐나간다거나, 학우들을 별 이유 없이
때리거나, 각목을 들고 돌출 행동을 하거나, 소름끼치는 협박을 해 왔다고 한다.
상황이 악화하자 학생과 학부모 들이 공개적으로
이군을 전학시키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공주경찰서 황정인 형사과장은 “이군의 정서 상태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맞다. 다만 이군의
문제가 친구들과의 불화로 인해 생긴 것인지, 문제가 있어서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인지는 논쟁거리다”라고 말했다.
무엇이 비극을 초래한 것일까. 시기 별로 이군을 추적해 보았다. 이군이 처음부터 문제 소년은 아니었다. 이군의
모교인 수원 삼일중학교 교감은 “이군은 촉망받는 학생으로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다. 학생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일부 뉴스를 보고 믿기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ㅎ고 입학 초기 이군의
고민거리는 주로 학업이었다. 중학교 때 1~2등을 다투었던 이군의 성적은 ㅎ고에서 하위권이었다. 성적 격차는 많은 명문고 학생들이 겪는 정체성
문제다. 게다가 이군은 사색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한 친구는 “이OO은 문학을 좋아했다. 글쓰기에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문학
서클이 없어서 아쉬워했다”라고 말한다.
1학년 2학기쯤부터
이군과 친구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ㅎ고는 이른바 ‘보딩스쿨’이라고 불리는 전원 기숙사 학교다. 8명이 한 방을 쓰는데 ‘전인
교육’ 취지로 협동 생활이 강조된다. 이런 공동 생활에 모두가 다 쉽게 적응하는 것은 아닌데, 이군의 경우가 그랬다. 이군의 별명은
‘스컹크’였는데,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났다고 한다. 알고보니 그 원인은 ‘어떠한’ 콤플렉스가 있는 이군이 남들과 같이 목욕탕에 가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군의 아버지는
유서에서 아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썼다.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학생들이 이군을 향해 명시적인 집단 따돌림을 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
학생 내부 사회에서 이군이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맞다. 학생들에 따르면 이군은 현 ㅎ고 학생회장 ㅈ군이 자신을 조직적으로 음해한다는 피해 망상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ㅈ군은 “1학년 때 그 친구와 기숙사 방을 같이 썼다. 한번은 공동
과제를 수행하는데 그 친구가 숙제를 안 해 팀이 피해를 보자 야단을 쳤다. 입학 초기여서 성적에 민감할 때였는데. 돌이켜보면 그 때가 불화의
시작이었던 같아 가슴 아프다”라고 설명했다. 이군은 그날 크게 울었다고 한다. 마치 닭과 달걀의 문제처럼, 학생들이 느끼는 거부감과, 그 거부감
때문에 더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이군의 모습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반복되었다. 24시간 학교 안에서 생활하는 기숙학교 특성상 이군에게 달리
탈출구는 없었다.
아버지는 학업 문제와 대인관계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강해지라고 요구했다. 1학년 때만 해도
이군은 전학을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학을 완강히 반대했다. 유서와 함께 이군이 직접 쓴 각서가 집에서 발견되었다. ‘다시는 부모님께 전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전학을 낙오라고 생각했다. 이군은 각목을 들고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고, 그것이 더
학우들의 반감을 불렀다.
학교는 아버지에게 ‘정신과 상담’을 건의했는데, 아버지는 내과 진단서를 학교에 제출했다. 정신과
진단을 받는 것 자체가 아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이군은 심한 스트레스로 소화기 질환을 앓고 있었다.
ㅎ군은
일정 기간 학교와 떨어지거나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것이 필요했다. 서울대 김동일 교수는 “무엇보다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낙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맞지 않을 뿐이다. 학교나 학부모 모두 ‘이상한 학생’으로 몰면
안된다”라고 말한다.
공주 ㅎ고 이군의 사례는 특정 학교의 문제가 아니다. 한 지방
과학고 교사는 최근 자살 충동을 느끼는 학생과 상담했다고 한다. “투신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학부모와 상담하면서 치유 중이다. 목표
설정이 너무 높은 학생이다.” 국내 과학고·외고·자립형 사립고에 상담 전문 인력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과목 교사가 상담 교사를 겸임한다.
2002년 개교한 과학기술부 산하
부산영재과학고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부산영재고등학교의 이성실 상담 전문 교사는 “하루에 3~4명이 찾아와 상담하겠다고 한다. 중학교
때와 달리 자신이 너무 평범해졌다고 고민하는 학생도 있다. 기숙사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곳에는 상담 전담 교사가 2명
있다.
ㅎ고 이군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문학, 글쓰기였다고 한다. ㅎ고 교사에게 고등학교 부적응자였던 문필가 헤르만
헤세의 예를 들며 “집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후에 큰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냐”라고 물어보았다. 교사는 “맞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육이 아직 그 정도를 수용할 만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