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공부 잘 하는 고등학생들을 보도하는 데에도 유행이 있나 보다. 가난한 집안의 수재가 대입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주종인 시절도 있었다. 사회면 톱에는 큼지막하게 축하 전화를 받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수재의 사진이 실리는 것이 관례였다. 헤드라인에는 ‘교과서 중심으로 충실히 예습 복습’ 같은 글귀가 실려 다른 평범한 학생들의 염장을 질렀다. ‘잠은 충분히 잤으며 따로 과외는 받지 않았다’는 말 역시 유행이었다. 수석들은 마치 수석연합회에서 인터뷰 사전 교육이라도 받고 나온 아이들 같았다.
세월은 변했다. 요즘은 그깟 국내 대입 시험 수석 정도로는 기삿거리가 안된다. 적어도 아이비 리그의
쟁쟁한 대학 몇 곳에 동시 합격 정도는 해야 기자가 찾아간다. 얼마 전 한 신문은 그런 아이들을, 하나도 아닌 여럿을 배출했다는 한 외국어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내 눈을 끈 것은 기사 중간에 돌출된 작은 헤드라인이었다. ‘영어 소설 즐겨 읽어’. 말 그대로 이 외국어 고교 학생들은
아이비 리그 대학 합격을 위해 평소 영문학의 고전들을 죽어라고 읽어 왔다는 것이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책을 바로 원어로 읽으며 에세이 쓰기를 준비해온 것이었다.
잠을 충분히 자고 과외는 받지 않는다는 정도로는 이제 게임이 안되는 것이다. 일단 제임스 조이스나 헤밍웨이 정도는 술술 읽어줘야 수재 소리를
듣고, 그런 학생들을 여럿 보유한 학교가 명문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영어로 교육받던 아이들이 문득 ‘문학 충동’을
느끼면…
나의 상상은 뻗어간다. 만약
이런 학교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전국의 학교 운영자들은 이제 명문 학교를 만드는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다. 영어로만 교육하는
것이다. 영어 소설을 읽히고 영어로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로 생물학을 배우는 학교가 명문이 될 것이 뻔하다. 학부모들은 매년 수십 명씩, 아니
수백 명씩 아이비 리그로 직행시킨다는 이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려고 줄을 설 것이다. 정부가 언제까지 이것을 틀어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분도
좋지만,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조기 유학의 물결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벌써 송도자유지역 내 국제 학교의 내국인 입학
비율이 논란거리인데, 어쨌든 내국인 학생을 전혀 안 받고서는 타산이 맞지 않으니 결국 받기는 받을 것이고, 이 학교 역시 단박에 명문 반열에
오를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다(아니면 왜 교육단체들이 논란을 벌이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전국의 수재들은 이런 자유무역지역의 국제 학교나 영어로만
교육한다는 외국어 학교들로 진로를 잡을 것이다. 대학도 영어 강의의 비율을 점점 늘려가는 판인데 고등학교라고 그 물결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이 사회를 이끌어갈 그 수재들은 고등학교, 아니 빠르면 그 고교의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교 시절부터 영어로 소설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문학적 충동이 생기면, 즉 ‘나도 한번 소설이란 것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그들은
아마도 영어로 생애 첫 습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독자는 읽고 감명받은 작품을 모방하기 시작하며 작가가 된다. 영어 소설에서 받은 감흥을,
평소 잘 쓰지도 않고 아이비 리그 진학에 도움도 안되는 한국어로 굳이 표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