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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보 가운데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가짜로 판명 나 지정이 취소된 것은 국보 274호 귀함별황자총통이 유일하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국보 지정 문제의 총체적인 문제점들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경우여서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지금은 이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보다 국보 지정 과정이 상당히 체계화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물을 찾기 위해 해군이 중심이 되어 만든 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당시 단장 황동환 해군대령)이 경남 통영군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에 장착되었다는 이 총통을 인양했다고 발표한 것은 1992년 8월18일. 이 총통은 발표 3일 만인 8월21일, 초스피드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임란사 연구 전문가인 조성도 전 해사박물관장(당시 62세·93년 사망)과 발굴단장 황대령(해사 22기·이 사건으로 구속됨)이 진품이라고 감정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들은 출토지점이 분명하고, 형태와 명문으로 보아 16세기말의 화포가 분명하다고 결론 냈다. 당시 이 총통에는 약실 부분에 ‘만력병신육월일조상’이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말대로라면 선조 29년인 1596년에 총통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조씨와 황씨 두 사람의 말만 믿고 이 총통을 국보로 지정했다. 과학적인 성분 분석 같은 것은 아예 시도하지도 않았다. 1차 조사를 담당했던 이강칠 문화재전문위원(전 육사박물관장)은 정식 학술보고서도 제출하지 않았고 2백자 원고지 5명 분량의 형식적인 감정서만 제출했다. 인양 당시에나 후에도 이 총통을 본 적도 없고 심의 당일에서야 보았다. 한마디로 형식적인 감정이었던 셈이다. 문화재위원회는 전문위원의 보고서조차 없는 상태에서 조·황씨의 말만 믿고 가짜 유물을 국보로 지정했다.


이 총통은 임창순·황수영·진홍섭 전 문화재위원장, 문명대 동국대 교수,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 안휘준 서울대 교수, 홍윤식 동국대 교수 등이 있던 당시 문화재위원회 2분과에서 국보로 지정했다. 하지만 분과위원 7명 가운데 임진왜란사나 과학사를 전공한 학자는 한명도 없었다. 문화재연구소가 “유사한 거북선 총통보다 아연 함유량이 지나치게 많다”라고 통보했지만 감정 과정에 반영되지 못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은 정재훈씨였다.


이 가짜 총통을 만든 사람은 골동품상 신휴철씨(당시 64세)였다. 그는 이 총통 외에도 갑옷 측우기 물시계 등을 만들어 골동품으로 유통시켜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이 신씨 집 지하창고에서 압수한 물품만도 총통 35-6벌, 측우기 2개, 물시계 1개, 대완구(가장 큰 화포) 2개, 청동가위 10개 등에 이른다. 신씨는 발굴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해왔다. 신씨는 가짜 측우기를 만들어 해사에 기증했는데, 해사는 ‘세계최고’라는 명문을 붙여 보물지정신청을 했으나 명문이 조잡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자칫하면 총통에 이어 가짜 측우기까지 보물로 지정될 뻔했던 것이다.
신씨는 검찰에서 “1992년 8월21일 국보로 지정된 문제의 총통은 육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1965년께 고철 수집상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황씨(해사 22기)는 정부로부터 받은 보국훈장 삼일장도 박탈당했다. 정부는 이 사건 이후 국보 지정을 하기 전에 일정한 기간 동안 예고를 하는 ‘지정 예고제’를 도입하는 등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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