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이 보도한 암살 주장 인물 조사 안해
역시 김형욱 실종 사건의 진실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은 컸다.
<시사저널>이(4월19일자) 커버 스토리를 통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파리에서 납치해 암살했다고 자처한 이○○씨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보도하자 이 기사는 즉각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신문·방송·인터넷 매체가 일제히
<시사저널>의 이○○씨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면서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김형욱 실종 사건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나돌던 각종
설과는 달리 ‘내가 납치, 암살했다’라고 주장하는 당사자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김형욱 실종 보도보다 믿을 만하다’는 쪽과
‘고도로 정교한 소설을 보는 것 같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이○○씨가 인터뷰를 통해 밝힌 침투 루트 및 납치 암살 과정의 세밀한 묘사가
특수공작원의 활동 내용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놀라움과 함께 신빙성을 높여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뚜렷한 물증을 제시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주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암살조장 이씨는 “자식들 키우는 내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사석도 아닌 언론에 나와 스스로 하지도 않은
암살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씨에게는 현재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가 있다.
"김 전부장 지갑에 2만 프랑 정도 들어 있었다"
김형욱 암살 실행 조장이라고 주장한
이씨의 자백 가운데 가장 큰 반향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단연 양계장 분쇄기를 사용한 암살 방법이었다. 그 엽기성이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이런 방식의 살인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살해 방식이 동원되었는지는 암살조장 본인 주장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뒤에야 진위 여부 판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으로 따지면 양계장 분쇄기를 이용한 암살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국내외 양계업자들의 설명이다. 또 유럽에서는 목재를 넣으면 톱밥으로
만들어줄 정도로 성능이 강한 각종 사료 분쇄기를 이용한 살인 범죄가 흔히 사용되기도 한다. 문제는 김형욱씨를 이렇게 제거했다고 했을 때 허리띠
버클이라든지 시계 따위 금속성 소지품은 현장에 남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씨는 26년 전에 행한 일이어서 세밀한 부분까지 다 기억나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편린들을 모아서
되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가 2만 프랑 정도 들어 있던 김형욱씨의 장지갑을 꺼낸 기억은 있지만 나머지 시계라든지 다른 소지품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나와 동행했던 곽후배가 꺼냈는지 그냥 분쇄기에 넣었는지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다른 의문점은, 당시 이씨가 동행했다고 주장한 후배
암살 실행조원 곽○○씨가 이스라엘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되어 암살 등 특수 훈련을 받았다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국가정보원측은
당시 모사드에 파견한 교환 훈련 인력 중에 곽씨 성을 가진 이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씨는 “후배 곽씨가 모사드로 파견 나가 특수 교육을
받고 왔다고 말해서 알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곽씨가 중정 정식 직원이 아닌 특수공작요원이었기 때문에 본명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 간부로 있던 인사는 “모사드와 인적 교류는 했지만 특수 암살 요원을 파견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양계업자들 “양계장 분쇄기로 살인 가능”
김형욱 전 중정부장 암살 조장을
자처한 이○○씨의 증언에 대해 국정원측은 ‘그동안 제기된 여러 암살설 중 하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 오충일 위원장은 “사건 관련자들이 가명이 아니라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고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 중정 직원이었다면 진실을
밝히더라도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한 이○○씨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지만 오위원장이 인터뷰 내용을 제대로
읽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중정 정식 직원이 아니라 특수 비선 공작원이었다고 밝혔다.
오충일 위원장의
이런 입장 표명에 대해 이○○씨는 ‘정보기관의 비합법 비밀 공작과 합법적인 사업을 혼동하는 발언’이라며 국정원이 자기를 부르면 언제든지 만나서
조사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시사저널>은 이씨의 이런 입장을 국정원에 전했다. 이 자리에서 국정원 관계자는 “이씨의 주장은
지난 2개월 동안 국정원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자료를 통해 조사하고 있는 김형욱 사건의 흐름과 차이가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이씨가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자기가 암살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윗선에서 중앙정보부가
개입했다는 연관성은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국정원 과거사 조사 대상으로 끌어들여 다루기도 어렵다. 다만 국정원으로서는 이씨가 추가적인 중앙정보부
지휘 라인 등을 공개한다면 그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조사할 수는 있다”라고 말했다. 또 현재까지 국정원으로서는 그가 중정이 운영하던
특수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근거도 없다고 밝혔다.
국정원측의 이런 반응에
대해 이씨는 ‘어이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국정원이 자기의 특수공작원 신분을 부인하고 김형욱 암살 개입 사실을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국정원과 함께 이 문제들을 놓고 공개 토론할 용의도 있다고 밝혔다. 이씨는 “하늘 아래 김형욱이 두 명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잡아다가 내 손으로
암살한 김형욱은 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이씨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다. “이씨의 암살 주장을 분석한 결과 여러 조각들을 주워다 끼워 맞춘 신빙성 없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국정원과
이씨는 현재 김형욱 실종 사건을 놓고 이처럼 서로 다른 주장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씨가 중앙정보부가 양성한 특수공작원이었다는 점과 김형욱
암살 실행조였다는 주장에 대해 진위를 밝힐 곳은 현재로서는 국정원뿐이다.
국정원이 이씨의 주장을 계속 외면한다면 김형욱 전 중정부장을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암살했다는 당사자의
증언도 영원히 하나의 ‘설’로 남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