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이 이번에는 리떵후웨이 전 총통 등 타이완 정계·문화계 유명 인사들을 만나 타이완과 한반도가 처한 ‘현실’과 ‘신념’을 들려준다.
독립이란 “홀로(獨) 선다(立)”는 뜻이다. 홀로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몸이 필요하다. 발꼬락에 가시가 돋혔어도 홀로서기가 힘든데, 하물며 어찌 두동강 나버린 몸으로 홀로 설 수 있으리오! 1945년 8월 15일의 사건은 독립이 아니라 해방이다. 해방이란 풀 해(解)에 놓일 방(放), “풀려난다”는 뜻이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풀려났을지언정 독립은 성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이 조선이 일본에 합방(合邦)되었다고 쓰고있으나 우리는 일본에 합방된 적이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일본과 식민통치에 관한 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 계약이란 반드시 쌍방의 합의로 이루어질 때만이 성립하는 것이다. 계약의 합의란 반드시 계약 당사자의 주체적 자발의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과 맺었다 하는 모든 조약은 근원적으로 그러한 합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보호조약, 합방조약은 모두 무효이전의 불성립의 사건들이다. 우리는 보호를 받은 적도 없고 합방된 적도 없다. 그냥 강점된 것이다. 그것을 합방이라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고요히 자고있는 내 방에 강도놈이 들어와서 내 아내를 강간하고 강탈해갔다고 해서 내 아내와 이혼이 성립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논리적 규정이다. 일본은 강도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백퍼센트, 천퍼센터 강도짓이다. 이 강도짓에는 일말의 도덕성도 없다. 그리고 이 강도놈에게 당한 우리 조선인들에게는 일말의 잘못도 없다. 잘못한 것은 백퍼센트 일본인이다. 우리의 연약함에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역사 자내의 자성에 관한 것이요, 일본인의 강도짓과 관련하여 쓸 수 있는 용어는 아니다. 8·15해방이란 이 강도놈들의 강점에서 우리나라가 풀려났다는 뜻이다.
1910년의 경술국치로 망한 것은 조선왕조일 뿐이다. 우리 조선국민은 망한 적이 없다. 백암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서언(緖言)의 한 구절을 보자.
저 대지의 풀을 보라! 들불이 저 풀을 다 사르지 못한다. 봄바람이 불면 꼭 다시
살아난다. 이것이 내가 우리나라가 반드시 광복하는 날이 있다고 믿는 이유다.
(相彼草卉,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此吾所以信吾國必有光復之日也?)
들불이 들풀을 다 불사르지 못한다. 뿌리가 있는 우리민족은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 우리 조선민족 전체가 새로운 독립국가를 수립해야겠다는
자각적 결의를 표명한 사건이 바로 기미독립선언이다.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그런데 이 기미독립선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독립 즉 홀로서기를 위한 우리민족의 행진은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다큐멘타리를 찍고 있는 이유다. 한국독립운동사는 과거사가 아니요 현재 진행형의 현대사인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분열을 종식하고 통일을 향한 염원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대만의 독립운동은 분리를 위한 염원이다. 그러나 이 두
독립운동에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민주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다. 동아시아역사에 있어서 20세기 서구문명이 도덕적 우위를 점했던 최후의
보루인 민주라는 가치를 국민의 삶 속에 구현한 나라는 대한민국과 대만 밖에는 없다. 일본은 민주의 절차적 외형은 있으되 내면적 자각이 없다.
일당독재의 지속이 정당화되고 있을 뿐이며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비열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들의 민주적 헌법 자체가 푸른눈의 쇼오군(將軍)인
맥아더에 의하여 주어졌을 뿐이며 역사의 내면 속에서 자각적으로 쟁취한 성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패전의 결과일 뿐이다. 그들의 염원은 아직도
오로지 메이지 드림의 영화, 제국주의적 독선과 오만의 회복일 뿐, 아직도 틈만 있으면 독도를 넘나보는 치졸한 만행, 타국을 침략하려는 영토적
야욕을 자행하는 어리석음의 미로를 헤매고 있다. 그들은 강점을 통해 조선민중을 지배하는 쾌감을 만끽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역사는 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조선민중의 인간성의 자각의 심도에 미칠 수가 없었다.
진총통과 대담을 나눈 3월 25일 저녁 나는 쫑샤오똥루(忠孝東路)에 있는 띵타이훵(鼎泰豊)이라는 만두집에서 대만의 지인들과 식사를 나누며
한국과 대만의 일제식민지 상황에 관해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중화TV 부사장 주리시(朱立熙), 행정원 문건회(文建會) 우진화(吳錦發)
차관, 정치대학 신방과 린위앤후에이(林元輝) 교수, 중화TV의 츠언밍츠엉(陳銘城) 등이 참석했다. 대만 지식인들이 그들의 식민지 경험을 통해
조선의 식민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엿보는 것은 매우 참신했다.
“대만은 본시 나라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독립된 국가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식민지 상태의 연속이었지요. 따라서 대만인들에게는 일본이 대만이라는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원한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청조가 대만을 버렸다는
유기(遺棄)의 피해의식이 더 강했어요. 일본보다 청나라를 더 미워했지요.” 우차관의 말이다.
쌩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가 새로운
주인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그리 불경스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버린 자가 사랑하는 혈육의 부모가 아니라 떠돌이 주인이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청조이전에는 쩡츠엉공(鄭成功) 3대의 치세가 있었고 그전에는 네덜란드인들의 식민통치가 있었을 뿐이니까.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기치아래 제국주의적 발호를 꿈꾸며 문명을 건설했다. 일본이 세계만방에 서구세력을 제외하고 최초로 제국주의 멤버십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알린 사건이
바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다. 10년전의 티엔진조약(天津條約)과 비교하여 리홍장과 이토오 히로부미의 거만한 자세들이 어떻게 역전되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면 가관이다. 거대한 대륙의 리홍장은 조그만 섬나라의 시모노세키까지 와서 대제국의 리더임을 자처하는 이토오앞에 무릎을 꿇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차스럽게도 어떤 일본 광신자의 총까지 맞아가면서. 조선의 동학 혁명전쟁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은
대만·펑후(澎湖)열도를 전리품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이제 더이상 아시아에서 일본제국의 꿈을 저지할 세력은 부재했다. 다음 일본은 겁을 주어야
할 상대를 서구에서 골라야했다. 이때 걸려든 것이 러시아! 일본은 당시 최강의 발틱함대를 전멸시켰고 그 전리품으로 조선을 집어먹은 것이다. 결국
청일전쟁의 전리품이 대만이었고, 노일전쟁의 전리품이 대한제국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병탄이야말로 만방에 일본제국주의의 위용을 자랑한 가장 강도높은
과시였다.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에로의 화려한 데뷰였다. 그런데 조선은 나라였고 대만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어떻게 식민통치의
성격을 규정했나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다.
“일본은 대만에게 무력적으로 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대만통치에 대한 공포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장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맞본 혹독한 역사적 경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민족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쎄게 조지지 않으면 크게 당한다는
공포감이 있었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를 객화시켜 보기 힘들다. 나는 대만인들의 시각을 통해 비로소 임란의 이순신 해전과
일본식민통치의 무단적 성격의 연결고리를 상기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초기임정의 주역인 신규식선생이 그토록 한국혼의 구현체로서의 이순신을
외쳤어야만 했는지도 이해가 갈만했다. 한국인의 본래의 모습은 문약(文弱)이 아니라 무강(武强)이다. 이순신은 고구려로부터 내려온 무강의 한국혼을
발현한 근세의 민족영웅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이순신을 두려워하듯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나치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아리안족의 신화를
만들었다. 아리안의 정통후계로서의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들보다 우수하다고 여겨졌던 유태인을 지상에서 멸절시킬려고 했다.
탈아론(脫亞論: 일본인은 저열한 아시아인종에 속하지 않는다는 메이지 계몽사상사들의 주장)을 외치며 메이지드림을 꿈꾼 일본인들은 해(日)의
뿌리(本)의 나라,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후손인 그들이야말로 독보적인 최우수 인종이며, 이 최우수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에게
문명을 전해준 더 우수한 인종인 단군의 후손들을 지구상에서 멸절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유사한 발상이었다.
“한국으로 나간 총독은 대개 육군계통이었어요. 그리고 대만으로 나간 총독은 대개 해군계통이었지요. 해군은 영국유학생이 많고 항해를 위해서
대수학·기하학을 배우기 때문에 사고가 합리적이었어요. 그리고 대만에는 쵸오사쯔(長·薩)번출신의 개명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한국에는
칸토오(關東)의 흉장(兇壯)한 사람들이 많이 갔어요.”
이 우차관의 말은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한국총독 8인(사이토오가 재임, 9기의
총독이 있지만 사람은 8인)중 대부분이 육군대장 출신이지만 사이토는 해군총무장관 출신이다. 그리고 한국의 무단정치를 수립한 장본인이 모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을 비롯하여, 소네 아라스케(曾?荒助), 테라우찌 마사타케(寺內正毅), 하세가와 요시미찌(長谷川好道)가 모두
쵸오슈우벌(長州閥)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쵸오슈우벌 사람들이 더 개명한 문화정치를 했다는 말은 정확치 않다. 그리고 대만을 지배한 19명의
총독중에 해군출신은 2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총독은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육·해군대장출신의 초특급 무인들이었지만, 대만총독
19인중에는 문관이 9명이나 된다. 그런데 대만총독으로 문관이 임명된 것도 1919년 조선의 3·1운동의 영향하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대만총독도 무관이었다. 3·1운동의 충격으로 대만에서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와 지방자치로 전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3·1운동으로 인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도 더 지독한 무관들만 보냈다. 그리고 조선총독은 대만총독보다 위계가 높았다. 조선총독의 대부분이
본국에서 내각수반의 지위에 올랐다. 하여튼 일본의 조선식민통치는 대만통치에 비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당연하죠. 일본에게서
한국은 전방이었고 대만은 후방이었죠. 한국은 대륙침공을 위한 병참기지요 침략기지요 전략기지였지만, 대만은 보급기지요 무역기지요 중개기지였어요.
그리고 한국인은 대륙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고 또 대륙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대만은 고립된 섬나라였기 때문에 한국인과 같은 지속적
저항을 획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린교수의 말이다.
한국인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대체적으로 놀라는 사실은 대만인 즉 본성인(本省人:
국민당과 더불어 대륙에서 온 外省人과 대비되는 개념)들이 일본사람들을 너무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나를 만나도 일본말을 뇌까릴려고 애쓰고,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동경같은 것을 서슴치 않고 말한다. 국민당 계엄통치에 비한다면 차라리 일본의 식민통치가 질서가 있었고, 삶의 질의 제고가
있었고, 더 온화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대만독립의 아버지” 스밍(史明)선생은 이런 논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일본과
국민당의 통치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낫다(better)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본질적으로 도덕성을 결한
것이고, 이후 국민당 식민통치의 모든 가능성의 기반을 닦아놓은 것입니다. 죄악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뽑을 생각을 하지 않고, 국민당과
일본제국주의자를 비교해서 일본식민지의 과거사를 긍정한다면 대만은 영원히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나는 조선민족이
우리 대만사람들보다는 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일본에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 중에는 가치판단이 투철한 지사들이 많았어요.”
“아니
일본사람들이 대만사람들을 온화하게 대접했다구요? 그것은 참 웃기는 얘기지요. 일본의 황군(皇軍)은 크게 다섯 직급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군인(軍人)이었고, 군인은 모두 일본인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군속(軍屬), 그 다음이 군견(軍犬), 그 다음이 군마(軍馬), 그 다음이
군부(軍?)라는 직급이었습니다. 징용된 대만인은 모두 군부에 속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와 말보다 저급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고도
일본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구요? 단지 인간으로서의 자각의 심도가 천박할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조선인의 항거는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
대만인들에게 끊임없는 각성의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대만역사에도 항일투쟁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1895년에 이미 ‘대만민주국’(臺灣民主國)을
성립시켜 투쟁을 했고, 그 뒤로 끊임없는 원주민과 대만인의 의민유격(義民游擊)과 민족혁명적 항일투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1920년 이후로는
거의 완전히 평정되었습니다.” 린교수의 말이다.
나는 대만식민지역사에도 초기에는 강렬한 항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러니까
대만에도 의병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대만의 식민지역사는 “의병활동”이 “계몽운동”에 의하여 완전히 진압된 역사였다. 계몽운동은 자연히
“근대화”를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친일성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식민지 역사는 의병활동 그러니까 무장투쟁의 정신이
애국계몽운동을 압도하고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은 역사였다. 한민족은 세계 각지에서 거족적으로 최후의 일순간까지 찬란한 무력항쟁을 전개했다. 조직적
항쟁이든 개인적 항쟁이든 강도놈들을 삼천리 금수강산으로부터 쫓아내야 한다는 일념에는 도덕적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내 집에 강도가 들어
부모형제를 죽이고 불을 질렀는데 가만히 보고만 앉아 있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현재 대만인들의 식민지사에 대한 것은 직접
체험이라기보다는, 국민당통치의 악랄함에 비교해서 미화된 관념이지요. 그것은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이며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입니다. 그러나 대만역사에서는 식민지 근대론(Colonial Modernity)을 인정치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식민통치 전후가 너무도 사회성격이 엇갈리니까요.”
대만의 저명한 인류학자이며 행정원 문건회주위(문화부장관)인 츠언치난(陳其南)선생의
말이다. 일본은 대만에서 쌀과 설탕을 생산했다. 철도를 놓아 대만토지의 일체감을 형성시켰고 성공적인 교육투자를 했고 의료제도와 의학연구를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나는 인류의 역사에서 근원적으로 근대성(Modernity)을 거부한다. 모든 근대론 자체가 서구역사발전단계를
정당키 위한 하나의 관념적 방편(方便, up?ya)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국역사를 이야기할 때 근대(Modern Age)라는 틀이 없이도
얼마든지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나의 주장을 폈다. 한국역사에 근대가 마치 필연적 단계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역사는 서구역사가 달성한 근대적 가치관을
달성하기 위해 줄달음쳐야만 한다. 웃기는 얘기다. 줄달음치는 주체는 서양인이 아닌 한국인이요, 그 목표는 내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그것이
반드시 근대라는 목표는 아니다. 나는 독립운동사에서는 근대라는 말을 피한다. 동학부터 오늘 노정권의 문제까지 모두
“현대사”(contemporary history)로서만 규정한다. 근대가 없으니 포스트 모던도 사라진다. 완벽한 해체다. 의사이며 시인인
커지아(客家)인 문학가 쩡꿰이하이(曾貴海)선생은 나에게 “동방의 니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었다. 과히 기분 나쁜 표현은 아니다. 입(立)과
파(破)는 항상 동시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3월 30일 오후 2시, 쫑샤오똥루(忠孝東路)에 있는 구 미대사관저에서 시에츠앙팅(謝長廷) 행정원원장(국무총리)과 프레스 공개토론을
했다. 내평생 그토록 많은 카메라 앞에서 얘기해본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시에원장은 쿄오토대학(京都大學)에서 법철학 박사를 획득한 학자로서 매우
폭이 넓고 온건한 사람이었다. 차기 대권주자로 유망시되고 있다. 우리의 담론은 매우 철학적이었다. 주제는 글로벌라이제이션(全球化: 세계화)과
로칼라이제이션(在地化, 本土化: 토착화)!
― 세계화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과학이고 기업이고 세계적 네트워크나 보편성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이미 세계화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정치담론으로서 세계화를 새삼 떠드는 것은 결국
미국사람들 때문이죠. 미국사람들이 자기가 지배하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라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세계화는 미국화일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세계화가
아니라 토착화일 뿐입니다. 토착화란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유니크한 가치들을 마음껏 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착화는 보편적 인간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토착화는 보세가치(普世價値)를 지니지 않으면 퇴화되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1972년부터 74년까지 대만대학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30여 년 동안 난 중국말을 쓸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니까 그럭저럭 중국말이 터져나왔다. 나의 일갈의
제스추어와 직선적 언어스타일은 점잖은 대만사람들에게는 좀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진정한 토착화야말로 곧 세계화라는 김교수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대만의 가장 큰 문제는 족군(族群), 정치세력, 식물, 동물 그 모든 것이 다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만의 과제는 이 다양한 성분의 공생입니다. 대만의 사군주의(社群主義, communalism)는 협애하게 규정될 수 없습니다. 라오쯔(老子)도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말했는데 이런 문제에 관한 김교수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대만의 아이덴티티문제는 결코 중국적 요소를
버리고(去中國化) 원주민적 요소를 부활하는 스타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여태까지 억압된 것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상의 가치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21세기적 세계에서는 모든 가치를 포용해서 어떻게 그것을 나의 삶의 가치로 발현시키느냐, 어떻게
인간의 보편성 심성에 그것을 아필시키느냐 하는 것만이 관건입니다. 라오쯔가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말한 것은 삼재(三才)의
최종가치인 ‘도’(道)의 개방성에 관한 것입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할 때의 자연(自然)은 명사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는 술어적
상태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실체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대만의 인동(認同) 즉 아이덴티티가 어떤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며 퇴행적 규정입니다. 대만인이나 한국인이나 우리의 문화적 성취를 너무 얕보면 안됩니다(不要小看自己).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21세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세계문명의 전위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대만과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역량은 동·서·고·금의 다양한 패러다임의 도전을 거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조금만 각성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면 서양문명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아시아적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서구인들이 규정해온 보세가치를 뛰어넘는 우리자신의 보세가치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대만의 민주가치는 세계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류의 성취입니다. 이제 대만의 사명은 문화적 역량으로 민주의 가치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 지식인의 사명은 부단한 비판에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에 대한 애정을 잃으면 안됩니다.
“동감입니다.”
―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政治的人)들이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줄 알아야지요.
“까오쩡즈더르언”이란 나의 말 속에는 정치인들에 대한
비하의 톤이 섞여있었다. 시에원장은 그 죠크를 캣치하면서 활달하게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여정의 마지막으로 대만정치의 거목이며 사상가인 리떵후에이(李登輝) 전총통을 만났다. 딴쉐이(淡水)에 있는 그의 연구원 건물 30층에서
3월 30일 오후 4시부터 비공식면담으로 이루어졌다. 2시간 반에 걸친 긴 대화였다. 그 대화의 자리를 뜨기 전에 리 전청통은 나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킨상, 난 이론이 없으면 행동을 하지 않거든. 킨상, 좀 도와주구려. 내 책 읽고 틀린 것 있으면 말해주고, 새로운 이론이
있으면 날 좀 가르쳐달란 말야!”
그는 확실히 거인이요 거물이요 거장이었다. 그리고 매우 이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와나미분코(岩波文庫)의 책을 1400여 권이나 읽었다고 했다. 그것은 그에게는 문명의 젖줄이었다.
“대만사람은 철학에 관심이 없어. 돈만
벌면 그 뿐이야. 그러니깐 표류하지. 표류하면 안되는데 말야.”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는 니시다철학(西田幾多郞, 1870~1945)의
신봉자였다. 니시다철학의 고전주의 성격, 그러니까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이니 하는 변증법적 논리를 대만에 사는 자신의 시대적 문제의식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20대에 니시다의 ??선의 연구??(善の硏究)니 하는 책을 읽고 그러한 형이상학적 관념론이나 순수경험적
실재의 이론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현실감각을 결여한 몽상가의 주절거림으로 생각했다. 그의 “장소”도 결국 논리적 픽션의
장소일 뿐 생명의 역사적 현장이 아니었다. 그의 관념철학은 일본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킨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니시다철학에는 매우 복잡한
동·서철학의 심오한 논리가 모두 융해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새로운 해석도 다 포용한다. 리떵후에이는 자기의 대만주체철학을 니시다의 “부정의
논리”를 통하여 심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중화세계의 유태인이라고 불리는 커지아(客家)인이다. 그리고 화인으로서는 보기드문 기독교인이다.
그러니까 그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다. 종교적인 만큼 이론적이고 관념적이고 초월주의적이다. 그러나 매우 치열한 현실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관은 단순히 초월적인 인격 존재자의 이론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절대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종교관은 기독교 신관과
선(禪)적인 무차별 경계를 묘합시킨 것이다.
“킨상! 서양철학은 지나치게 인식론 중심이야. 과학의 배경을 캐다 그렇게 빠진 거야. 그런
철학만으로는 대만문제 해결 안돼. 대만인들은 원래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 의식의 흐름 속에서 자기존재를 걸어 맬 말뚝이 없단 말야. 전전에는
일본사람이 지배하고 전후에는 국민당이 지배하면서 자기동일성이 완전히 파괴되었지. 2·28대학살사건을 모르고서는 국민당통치에 유린당한 대만인들의
자아상실감을 알 수가 없지. 요즈음 나의 사상은 두 가지야. 첫째는 중국문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고 둘째는 내가 과연 누구냐는 물음이지. 난
종교인이지만 내세는 안 믿어. 유한한 인생 속에서 얼마나 영원한 생명가치를 창출하느냐 그것만이 관심이지. 의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거지. 공산주의도
엉터리야. 쑨원(孫文)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 했는데 지난 100년 동안 중국대륙에 전혀 지켜지지 않았어. 공산혁명도 프롤레타리아혁명이론인데
중국공산혁명은 농민반란과 패권주의를 결합한 수준의 놀음이지. 마오쩌똥이 천안문에서 공화국건립을 선포한 것도 새로운 황제의 꿈을 이룬 것이야.
인민은 사라졌어. 지금은 혁명세대의 각고의 정신마저 사라졌지.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존재의 부정이야. 나는 나가 아니라는 부정으로부터
출발해야 돼.”
― 리떵후에이로부터 츠언쉐이삐엔에까지 이르는 대만역사의 발전은 중국을 견제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습니다. 대만으로
인해 세계정세판도가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도대체 앞으로 무슨 프로그램으로 버틸 심산이십니까?
“중화민국이 대만에 있었을
뿐이야(中華民國在臺灣). 중화민국과 대만은 별개야. 지앙징꾸어(蔣經國)씨가 왜 나를 그렇게 잘 보아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국민당의 군사문화적
치세 속에서도 어떻게 문민정치를 조성하는가 홀로 깊게 고민했지. 지앙징꾸어씨는 막판에 이런 말까지 했어: ‘나도 대만사람이다.’(我也是臺灣人).
국민당이 이런 식으로는 대만에서 계속 살 수 없다고 말했어. 반드시 토착화되고 자유화되어야 한다고 인식했지. 난 그가 죽은 후에도 13일 동안
영묘에 매일 나가서 공경하게 절을 하곤했지. 일종의 정치적 쇼라고 말할 수 있지. 정적을 안심시켜야 하니깐. 집권 2년 동안 나는 아주 착한
아이처럼 아무 일도 하지않고 지냈지. 역사의 변화를 기다렸던 거야. 1990년 봄부터 학생데모가 터져나왔어. 나는 이들을 총통부로 불러 그들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고, 그 기회를 틈타 사회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지. ‘만년국회’를 없애버렸고 내전상태종결을 선언했지. 그리고 헌법개정을
서둘러 총통직선제를 만들었고 허명뿐인 성정부(省政府)를 없애버렸지. 군대도 당의 군대였던 것을 국가의 군대로 변화시켜버렸지. 지금은
중화민국이라고는 하지만 과거 장지에스부자왕조의 중화민국과는 완전히 달라진 거야. KMT(국민당)에서 DPP(민진당)으로의 변화! 이런 변화를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중국이야. 그러나 대만의 주권은 중국에 속하지 않아. 우리의 활로는 오직 민주화·자유화밖에는 없어. 그리고
정명(正名)이야! 모든 이름을 바로 잡아야 해!”
― 당신은 정명을 통해 주체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 주체성은 결국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
우파에 기생하는 주체성이 아닙니까?
“아하! 그렇게 말하면 안돼. 우리의 문제는 우파·좌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야! 세계를 그렇게
좌·우로 단순하게 갈라보면 곤란하지.”
― 당신이 너무 지나치게 일본 우파에 기생하여 중국과 대적하기 때문에 대만을 아시아의 화약고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미·일·중, 이 세 나라가 모두 사고방식이 달라. 그런데 지금 현안은 중국의 해군이야. 지상군의 무력의
한계를 잠수함으로 돌파하려 하는데 참 무모한 시도를 하고있어. 요즈음 중국이 돈 좀 번다고 돈 가지고 뭐든지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우리
대만인은 자유민주주의의 역량을 가지고 중국독재정권과 싸우는 수밖에 없어.”
― 국제정치역학의 발란싱작용을 잘 활용하면 물론 대만은
살아남겠지요. 그러면 내부의 화합이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 어떤 프로그램으로 밀고나갈 생각이십니까?
“지난 10년 동안 대만인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는 운동에 대한 지지는 꾸준히 증가했고 지금은 75%를 넘어섰어. 그것은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지. 이제는 외성인도 4대까지 내려오는데 그들은 모두 대만인으로 자기를 규정하지. 국민당 반동세력은 이미 뿌리를 내릴
아무런 토양이 없어.”
― 대만공화국은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는 겁니까?
“지금 국가 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한
문제가 너무 많아. 비자가 없으니깐 통관·검역도 안돼. 중화민국은 벌써 존재하지 않아. 양안관계와 정명운동은 별개문제야. 국가임을 인정하고 서로
교류하고 도와가면서 잘 살자는 것이야. 대만의 국가인정이 거시적으로 중국에게 손해될 것이 아무 것도 없어.”
― 당신의 기독교철학은
화인세계를 설득하는데 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신은 궁극적으로 내 마음 속의 문제일 뿐이야. 불교·유교·도교의 모든 해석을 다 포용할
수 있어. 모든 리더는 반드시 신념이 있어야 돼. 뾰족한 정상에 올라서면 아무도 올라오지 못해. 나 홀로 서야 돼. 구원해줄 사람이 없지. 그때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신념이야. 나는 그 신념을 절대자로부터 얻지.”
― 존경스러운 삶의 자세이지만, 당신의 신앙의 관념만 믿다가 국민이
희생되면 어찌할 것입니까? 당신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 대륙에서 포탄이 날아오면 어떠하겠습니까?
“난 철학·신학전공자가 아니야. 농업경제
전공이라구. 난 일본군인도 했지. 전술공부도 했거든. 인민의 사소한 문제부터 처리하는 프로페셔날리즘이 내 본연이야. 1999년 9월 21일
대지진을 처리해나간 나의 대책을 보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신속했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지. 중국의 미사일공격에 어떻게 대처하나? 다
18계책략이 있지. 그걸 어떻게 당신에게 다 말하나?”
― 대만이 화약고도 될 수 있지만 세계평화의 진원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의 책임은 국민에게 안심감을 주는 일이야. 핵심은 경제야. 이것도 다 18계책략이 있어. 그런데 내가 총통이 아닌데
당신에게 뭔 말을 하겠나?”
― 민진당정권이 아직도 군사·정보·관료조직을 다 장악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걱정할 것 없어. 군인은
군인의 특수한 문화와 내재적 논리가 있어. 그들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해주면 결국 다 변하게 되어있어.”
― 건강유지비결은?
“의사 말
안 믿고 내 몸에 대한 내 판단을 믿지.”
― 삶의 신조는?
“사(死)와 성(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사는 것, 사는 동안
성실하게 사는 것.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치되는 삶이지.”
― 당신 사상의 뿌리는?
“난 일본사상의 신봉자가 아니야.
오히려 내 뿌리는 독일의 질풍노도(Strum und Drang)라고 말해도 좋아. 괴테의 ??파우스트??, 칼라일의 ??의상철학??,
신란(親鸞)의 ??출가의 제자??(出家の弟子), 이 세 책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지. 절대부정은 절대긍정이지. 불(佛)은 최후긍정,
주관과 객관의 절대적 통일이야. 신도 그러한 통일이 이루어지는 장소. 신(神)도 곧 불(佛)이야. 나는 나의 나가 아니며, 대만도 대만의 대만이
아니지. 그러나 최종적 결론은 아(我)가 곧 대만이라는 것이지. 나라에 도덕이 없으면 망해. 김교수와 같은 아시아의 지도자들이 도덕을 만들어가야
돼! 우리 모두의 과제야.”
난 대만에서 9일 동안 너무도 많은 체험을 했다. 국민당치세 동안에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던
뤼따오(綠島)라는 태평양의 빠삐용감옥에도 가보았고 다양한 원주민문화, 커지아문화를 체험했다. 그리고 일제식민지의 갖가지 잔재를 보았다. 그리고
국민당 당사회(黨史會)에 보관되어 있는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의 생생한 기록, 비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그리고 약산
김원봉의 친필서한들을 보면서 눈물겨운 사연과 대륙의 말발굽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김원봉의 유려한 필치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지성인이었으며 국민당에게도 중후하게 비쳐진 거물인가 하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석린(石麟) 민필호(閔弼鎬)라는 인물의 활약상을 명료하게
목격했다. 상해·중경임시정부의 모든 살림은 실제적으로 국민당의 도움 아래 석린 민필호가 꾸려나간 것이다. 지앙지에스는 거의 석린을 통해서만
거액의 돈을 건네주었다. 석린은 중국국민당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가교였다. 그러나 그렇게 실제적인 일을 한 양심적인 인물들은 모두 쓸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4월 1일 나는 귀국했다. 그런데 오자마자 내가 사는 동네에 고층건물이 너무 많이 들어선다고 나보고 민원 앞장을
서달라고 동네사람들이 조른다. 조금만 서로 양보하면 될 텐데. 나 혼자 높이 짓고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엊그제 서대문구청장을 면담하고 나오면서
난 시 한 수를 지었다.
대롱같은 하늘만
보고 살겠다
그거라도 뚫렸으니
숨은 쉬겠지
실낱같은 생명의
끄나풀이라도
매달 수
있겠지
살아야지
살아야지
홀로설 수 있는
그날까지
피아골 들국화가
웃음짓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