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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 3사, 독특한 구성·내용으로 눈길 끌어

 
공중파의 시트콤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편성 편수가 대폭 줄어든 요즘, 오히려 살아 남은 시트콤들은 열혈 시청자를 거느리며 시트콤 제2 라운드를 예고하고 있다. 방영 한 달째를 맞아 한창 물이 오른 MBC의 판타지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서서히 달구어졌지만 어느 프로보다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한 KBS <올드 미스 다이어리>, 새로 시작한 SBS <귀엽거나 혹은 미치거나>가 그 주역이다.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곳은 MBC <안녕, 프란체스카>이다. 방영 한 달째. 시청률은 15%를 넘어서지 못하지만 열기는 심상치 않다. 일명 ‘프란체 폐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예고 봤을 때 뜨악했다. 웬 흡혈귀? 한달 후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봤다. 나, 지금 다시 보기로 몽땅 처음부터 보고 있다. 눈 아퍼 ㅜ.ㅜ’ ‘삼수생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책’.

<안녕, 프란체스카>의 주인공은 루마니아에서 일본 안전 가옥으로 피신하려다가 인천항에 잘못 내린 흡혈귀 일당이다. 그들은 인간 두일을 가장으로 삼아 가족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안녕, 프란체스카>에는 콩가루 집안에서 익숙한 갈등들이 이어진다. 혼자 뼈빠지게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두일은 보석과 먹을 것을 밝히는 뻔뻔한 흡혈귀들을 저주하고, 흡혈귀는 하필 그런 무능한 인간에게 빌붙어 살아야 하는 것이 한심스럽다며 두일을 무시한다. 꼬마 소녀 소피아가 실은 가장 서열이 높은 ‘왕고모’라는 사실은, 아이가 서열 1위가 되어버린 현대 가족의 현실을 환기한다.

이처럼 흡혈귀라는 판타지 코드를 택했지만, 공감대를 자극하는 코드는 사회성이다. 프란체스카가 무능한 가장을 비웃으며 생업 전선에 나서 보지만, 주어지는 일감이라고는 마트에서 고기 굽기, 야쿠르트 배달하기, 노래방 도우미가 고작이다. 설날이 되자, 드라마에서 본 가족들의 갈등을 흉내내는 대목은 겹겹이 풍자적이다. ‘네 년이 들어온 후 집안이 망했다’며 악독한 시어미 흉내를 내던 왕고모 소피아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은 설날이 되면 이렇게 물어뜯을 듯이 싸우며 놀던데?”

 
KBS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섹스 앤드 시티>의 설정과 터치를 닮았다. 서른한 살 노처녀 셋과, 환갑과 고희 즈음인 할머니 자매 셋의 일상을 통해 웃음을 선사한다. 최근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때아닌 여성 비하 논쟁에 휘말렸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시대착오적이며 여성 비하적인 내용 일색’이라며 ‘빨리 막을 내리기를 바란다’는 모니터 보고서를 내놓은 것이다. 이에 제작진은 여성민우회의 1,2차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시청자에게 의견을 묻는 것으로 ‘맞장’을 떴다.

여성 단체의 표적이 된 이유는, 세 여성이 모두 전문직이면서도 직업적인 자존심을 찾아보기 힘들고 사랑과 결혼에 목을 맨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진이 민감하게 반응한 데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폭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이 깔려 있으며, 시청자들은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최근 들어 내용도 남자 문제뿐 아니라 직장 생활의 애환 등 한층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올드 미스 다이어리>가 남다른 것은 세 할머니를 주요 축으로 내세운 대목이다. ‘젊은 여자 셋, 늙은 여자 셋’의 얼개를 짜기는 쉽지 않았다. 방송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구도라며 우려를 표했다.

시트콤계의 전설적 PD도 복귀

결과는 안타.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들을 훈계하며 ‘공포의 쌍문동 쓰레빠’로 떠오른 큰언니는 어른 부재 현실에 맞서는 짱짱한 노인상을 보여준다. 노인들의 로맨스와 결혼을 둘러싼 요지경도 세밀하다. 이 집안의 살림살이를 독신인 처남이 맡고 있는 것도 유용한 설정이다. 아내나 어머니라는 우아한 외피가 없어 전업 주부의 애환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SBS <귀엽거나 혹은 미치거나>는 아직 성적표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순풍산부인과> <오박사네 사람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 마니아 팬을 거느린 시트콤계의 전설 김병욱 프로듀서의 복귀작인 만큼 어느 프로보다 기대치가 높다.

원래 시트콤의 경쟁력은 틈새이다. 드라마보다 웃기고, 코미디보다는 힘이 있다는 것이 시트콤의 경쟁력이었지만, 이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안녕, 프란체스카>의 노도철 프로듀서는 “점점 코믹해지는 드라마와 드라마를 흉내내는 코미디의 협공에 맞서야 한다”라고 시트콤이 처한 현실을 표현했다.   

 
<인녕, 프란체스카>의 노도철 프로듀서는 자신이 미국의 인기 시트콤 <프렌즈>나 <섹스 앤드 시티>를 일상으로 즐기던 세대라고 강조한다. “우리 세대는 카피가 아니라 재생산이 가능하다. 솔직히 우리도 저 정도 못만들까 싶었다.”
그 자신감이 빛을 보았다. 인터뷰가 있던 날 아침 최문순 사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딸래미랑 자신이 그 프로의 열렬한 팬이라는 것이다. 이미 <안녕, 프란체스카>는 지난 2월 MBC가 자체 시상하는 ‘이 달의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다.
MBC에 1996년 입사한 그는 예능국에서 잔뼈가 굵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 <느낌표!>의 하자하자 코너, <서경석의 하지마> 등을 통해 메시지와 재미를 한 데 비벼넣는 법을 배웠다. 그의 감각이 빛을 발한 프로는 12부작 미니 시트콤 <두근두근 체인지>.
그 전력이 아니었으면 <안녕, 프란체스카>는 태어날 수 없었다. ‘윗선’에서는 기획 단계뿐 아니라 방영을 앞두고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판타지 시트콤이 모두 폭삭 망한 시점이었다. 선배들은 ‘노도철이니까 믿고 간다’ 며 부담을 팍팍 안겼다.
그가 젊은 세대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그들과 감성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스타워즈> <영웅본색> <슬램덩크>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미국와 홍콩, 일본의 대중 문화에 익숙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이 개봉할 때, 개봉 첫날 한 극장에서 세 번을 연거푸 보고도 성에 차지 않아 극장을 옮겨 또 보았다(그 흔적은 ‘내가 네 아버지다’를 변형했음이 분명한 ‘내가 니 친에미다’라는 대사에 묻어 있다). 소장한 DVD가 1천장이 넘고, 10평에 불과한 원룸에 100인치 프로젝터 TV를 설치한 영화광이다. 대학 시절에는 프랑스문화원을 거점 삼아 지냈고, 불어 원어 연극 동아리 활동으로 날을 지새웠다.
그렇다고 <안녕, 프란체스카>의 재미가 끼리끼리 키득대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패러디나 비틀기는 양념 수준이고 ‘지금, 한국’의 사람살이가 더 실감 난다. 호러 판타지를 기대했던 시청자가 오히려 불만을 털어놓을 정도로 이 프로는 블랙 코미디와 사회성 짙은 휴먼 드라마를 합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노도철 프로듀서는, 내심 남다른 욕심을 감추고 있다. 10년 동안 사랑을 받은 <프렌즈>나 시즌을 이어가고 있는 <섹스 앤드 시티>처럼 수명이 긴 시트콤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켜켜이 비밀투성이인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안녕, 프란체스카>는 이곳 저곳에 복선을 깔아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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