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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정보통신 박람회에서 주가 드높인 한국전자업체, ‘체빗2005’ 현장을 중계

 
독일 니더작센 주의 주도 하노버는 18세기 초부터 2백년 가까이 영국을 통치한 하노버 왕조의 영광이 깃든 도시다. 인구가 40만명에 불과해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해마다 3월이 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 전세계 정보 통신(IT) 업체들이 세계 최대 정보 통신 박람회인 ‘체빗(CeBIT·Centrum fur Buro und Information Technologie)’에 참가하기 위해 하노버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지난 3월10~16일 열린 ‘체빗2005’에는 전세계 69개국 6천2백70개 정보 통신 업체들이 참가했다. 업체 관계자 10만여명이 30만9천 평이나 되는 전시장을 가득 메웠고, 정보통신산업의 미래를 체험하기 위해 몰려든 전세계 관람객 70만명이 북적였다. 조에르그 숌버그 체빗2005 매니징디렉터는 “체빗은 전세계 정보통신산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전시회다”라고 말했다.

 
체빗2005에 참가한 한국 업체는 2백2개. 통신(Communications)·디지털기기와 시스템(Digital equipment & system)·기반 기술(Business Process)로 분류된 전시 주제 가운데 한국 업체들은 주로 통신과 디지털기기·시스템 영역 제품을 선보였다. 비즈니스 체빗2005를 주도하는 것은 일본과 타이완 업체다. 한국 업체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마케팅 활동을 펼쳤다.

체빗2005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디지털 강자’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한국 업체들의 열망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체빗2005에 참가한 전세계 업체들도 정보통신산업 분야에서 일고 있는 ‘디지털 한류’ 바람에 주목했다. 세계 최대 LCD 업체인 일본 샤프의 아야코 히라노 마케팅 담당자는 “체빗2005에서 LG전자와 삼성전자가 선보인 기술력과 마케팅 전략은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LG전자 부스에서 만난 독일 정보 통신 제품 판매업체 윌트제의 스벤 브뤼게 구매담당자는 “전시장 외곽 곳곳에 세워져 있는 LG전자와 삼성전자의 입간판과 벽면 광고를 보고 한국 업체들이 체빗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LG전자·삼성전자, 광고판 ‘점령’

브뤼게 씨처럼 체빗 전시장에 들어서는 관람객들은 LG전자와 삼성전자의 입간판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전시장 북쪽 진입로를 따라 LG전자 광고판이 줄지어 있다. 또 출입문 주변에 삼성전자 휴대전화 모양을 딴 입간판이 세워져 있고, 진입로에 잇닿아 있는 주차장 외부 벽은 삼성전자 광고판으로 가득했다. 일본 소니의 광고판은 2개에 그쳤으나 삼성전자 광고판은 8개가 넘었다.

삼성전자가 채택한 광고 전략은 ‘랩핑(Wrapping)’이다. 베를린 샤를로부르그 관문과 프랑크푸르트 돔 성당 복원 현장에 대형 휴대전화 광고판을 설치하고 하노버 공항과 체빗 행사장 주변을 삼성전자 광고로 도배하는 것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부문 사장은 “체빗2005 행사에 든 비용은 1천7백만 달러나 된다”라고 말했다.

 
통신 부문 전시관에서 삼성전자는 세계 1위 휴대전화 업체인 노키아와 2위 다툼을 벌이는 모토롤라를 규모 면에서 제압한다. 그 옆에는 LG전자가 지멘스·소니-에릭슨과 나란히 부스를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체빗2005에서 7백만 화소 카메라폰과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 방식 휴대전화를 출품했다. 7백만 화소 카메라폰과 HSDPA폰은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품으로 체빗2005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HSDPA폰은 3세대 광역부호분할다중접속(WCDMA)보다 데이터 전송 속도가 5~7배가 빨라 3.5세대로 분류되는 첨단 기술이다(64쪽 딸린 기사 참조). 삼성전자 부스에서 만난 독일 RWTH아헨 대학 공학도인 알렉산더 카겔 씨는 “세계 1위 노키아 부스에서 볼 수 없던 최첨단 이동통신 기술을 삼성전자 부스에서 볼 수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82인치 LCD TV 등 첫선

LG전자는 당장 유럽 시장을 공략할 3세대 WCDMA방식 휴대전화를 위주로 한 제품군으로 전시대를 채웠다. 또 지상파 DMB(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와 위성 DMB를 수신할 수 있는 휴대전화, 3차원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폰을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파나소닉 싱가포르 지사 연구개발 직원인 체 유링 씨는 “LG전자가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 휴대전화 기술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 제품들은 사용 편리성이나 디자인 면에서 돋보인다”라고 말했다.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은 체빗2005를 유럽 3세대 휴대전화 시장을 공략할 기회로 삼았다. 유럽 방식 3세대 휴대전화 3종을 포함해 29종 100여 가지 모델을 선보였다. 팬택은 지난해 체빗에 참가해 100만대(2억 달러) 규모 수출 상담 성과를 올린 데 고무되어 올해도 유럽·아프리카·중동 지역 사업자를 초청했다.

디지털 기기와 시스템 전시관에서도 LG전자·삼성전자·레인콤 부스에는 관람객이 넘쳤다. LG전자는 양산 제품 가운데 세계 최대 크기인 55인치 LCD TV와 71인치 PDP TV를 설치했다. 삼성전자는 막 개발을 마친 세계 최대 크기 82인치 LCD TV를 전시해 체빗2005 개막 전에 65인치 LCD TV를 내세우며 세계 최대라고 자랑한 일본 샤프를 멋쩍게 했다.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네트워크 업체인 심플라슨의 마이크 슈미트 씨는 “한국 업체들이 가진 기술력이 제품 개발력과 결합하면 조만간 유럽 TV 시장의 선두주자인 소니와 필립스를 위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 전시관에 관람객 ‘북적’

한국 대기업들이 디지털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세계 정보통신산업의 지존은 일본 업체라는 사실을 체빗2005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행사장 북쪽 정문 옆에 마련된 전시관 1, 2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정보 기술 기업과 함께 일본 업체들이 몰려 있었다. 참가 업체 사이에서 ‘일본관’이라고 불리는 전시관 1, 2에는 다른 전시관보다 훨씬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한국·타이완·중국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지만 현재 세계 정보통신산업을 이끄는 선두 주자는 일본이었다.

NEC는 세계 최초로 고화질(HD) DVD를 선보이고, 파나소닉은 양산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TV 가운데 최대 크기인 65인치 제품을 전시했다. 소니는 통신 기능을 탑재한 네트워크 워크맨과 칼 자이스 렌즈를 장착한 초소형 디지털 카메라(두께 9.8mm)를 전시하고, 야쿠모는 크기 3.6cm에 불과한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를 출시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카시오는 2.5인치 액정화면에다 5백만 화소 화질과 3배 광학줌이 장착된 초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전시했다. 중국 최대 전자업체 하이얼의 자오푸준(趙福單) 매니징 디렉터는 “LG전자와 삼성전자가 우수한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소니·NEC·파나소닉·히타치를 비롯한 일본 업체가 제품 개발력에서 앞서고 있다”라고 말했다.

 
체빗2005에서 한국 업체들은 기술력을 과시하는 데 치중하고 있으나 실속은 타이완 업체들이 챙기고 있다. 7백77개 업체가 참가한 타이완은 행사장 곳곳에 3~5평 규모의 부스를 마련해 전지·디스플레이·소프트웨어·PMP(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를 비롯해 모든 영역에서 갖가지 제품군을 선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나 LG전자 같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들이 ‘타이완’이라는 로고 아래 밀집 대형으로 뭉쳐서 관람객을 끌어들였다. 제품군의 다양성과 기술 측면에서 국내 기업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타이완 디스플레이 업체 풀레벨테크의 조이스 린 경리(이사)는 “한국 대기업들은 첨단 기술력을 과시하는 데 치중하고 있으나 중소기업이 위주인 타이완 업체들은 돈을 벌고 있다”라고 말했다. 행사장 겉은 삼성전자가 도배하고 내부는 타이완 업체가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타이완 업체들은 체빗2005를 수출 상담을 벌이고 판매 계약을 체결하는 사업장으로 생각한다. 전세계 정보 통신 업체들과 긴밀하게 연락하고 구매 담당자를 부스로 끌어들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참가국 가운데 타이완이 유일하게 독일 정보 통신 업체들과 공식 회의를 열고 양국 업체의 협력 관계를 모색했다.

재주는 한·일이 넘고 돈은 타이완이 번다?

체빗2005에 참가한 한국 중소기업들도 타이완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기술력을 과시하기보다는 실속을 챙기는 데 주력한다. 레인콤이 MP3 플레이어 ‘아이리버’를 유럽 시장에 알리기 위해 유통업체와 상담을 벌이고 있다. 이레전자도 출시를 앞둔 60인치 PDP TV와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를 선보였지만 역시 주된 관심은 유럽 시장 진출이었다. 이지맥스도 인터넷을 이용한 음성 전송(VoIP) 프로그램을 탑재한 MP3 플레이어 ‘ezmp-4200’을 출시하고 유럽의 틈새 시장 진입을 노렸다. 이 제품은 PC와 연결해 인터넷 전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타이완 최대 정보 기술 업체 벤큐의 낸시 라이 경리(이사)는 “한국 업체라고 하면 LG전자와 삼성전자밖에 몰랐다. 체빗2005에 참가하면서 한국 중소기업이 지닌 제품 개발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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