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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후가 밝혀졌다. 김형욱씨는 1979년 10월7일 늦은 밤 파리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시외곽의 한적한 양계장에서 사료 분쇄기에 투입되어 흔적도 없이 닭모이로 사라졌다. <시사저널>은 이같은 사실을 자백한 중앙정보부 소속 특수 공작원 출신 김형욱 암살조장 이00씨의 증언을 확보했다. 아울러 당시 파리 김형욱 실종 현장에서 한국의 유명 여배우였던 최지희씨가 유인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암살 실행조와 김형욱 회고록 저자인 김경재 전의원 등 복수 증언자를 통해 최초로 확인하고, 여배우 최지희씨를 직접 인터뷰해 “내가 아니라 다른 여배우”라는 해명을 들었다.

 이00씨와 곽00씨 두 사람으로 이뤄진 김형욱 암살 실행조는 거사 전 일본을 거쳐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에 있던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되어 특수 암살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프랑스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해 1979년 9월 하순 이스라엘 북부 항구도시를 통해 해상과 육상 침투 방식으로 파리에 접근해 들어갔다.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에서 화물선을 탄 두 사람의 암살조는 약 10일에 거친 항해 끝에 지중해, 지브롤터 해협, 북해, 도버해협, 벨기에 앤트워프 항구로 침투해들어갔다. 벨기에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현지 안내조의 자동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에 잠입해 들어간 암살조는 이틀간 사전 답사를 벌인 뒤 김형욱씨가 한국인 여배우와 만나려던 파리 시내의 약속장소에 접근했다. 이들은 그 여배우의 보디가드로 속이고 먼저 나타나 김형욱을 안심시킨 뒤 여배우 일행이 타고 있던 캐딜락 자동차로 유인 납치에 성공했다. 납치한 김형욱에게 마취제를 투여해 제압한 이들은 곧바로 김씨를 시외곽 양계장으로 끌고가 사료 분쇄기에 투입해 암살했다고 밝혔다.

 김형욱을 암살한 후 두 사람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빠져나온 뒤 지중해 끝 지브롤터 항구에서 침투할 당시 이용한 화물선을 다시 타고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로 되돌아와 도쿄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것으로 약 한달에 걸친 김형욱 제거공작 임무를 마쳤다.  

 김형욱 암살조장은 김형욱 제거 공작의 지휘 라인은 따로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데 대한 의분과 애국심의 발로에서 스스로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초 청와대 경호실의 호출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별관에서 술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당시 김형욱 사건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박대통령의 탄식을 들은 뒤 의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해, 박대통령으로부터 김형욱 제거에 대한 강한 암시를 받았음을 시인했다. 두사람의 암살조는 중앙정보부에서 발탁한 특수 공작원이었지만 이들은 그의 상급자는 물론 중정에도 전혀 보고하지 않고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김형욱 제거 공작이 김재규 정보부장 라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 라인에의 주도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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