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암살, 지휘 라인은 누구였나
<시사저널>은 김형욱씨를 직접 암살했다고 밝힌 실행조를 찾아냄으로써 그가 실종된 지
26년 만에 가장 구체적이고 믿을 만한 현장의 진실에 접근했다. 그러나 아직 암살 지휘 라인이 누구인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암살에 가담했다는 이○○씨는 ‘박대통령으로부터 암시를 받은 자기 개인의 소신’이라고
정리했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다. 그는 아직까지 중간 지휘 라인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가 암살을
실행하기까지 거친 수많은 경로에서 그를 도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군가 해외 현지를 지휘하는 공작이 뒤따랐음을
시사한다.
지난 26년 동안 김형욱씨가 한국 정부에
의해 실종되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유신 정권 시절 한국 정부기관 가운데 김형욱씨를 납치해 암살할 힘을 가진 기관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로 압축된다.
우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지시했으리라는 주장이 있는데,
최근 <월간 조선> 3월호 보도가 대표적이다. 이 잡지는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는 옛 중정 출신 간부 몇 명이 그런 주장을 폈다고
보도해 관심을 모았다. 유신 시절 중정은 항상 국내외 정치공작의 선봉에 선 것이 사실이다. 실제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동백림 간첩 사건 당시
납치 사건을 벌인 중정의 전력이 이런 심증을 굳히게 만들었다. 또 해외에서 그만한 일을 벌일 조직망을 가진 곳은 중정밖에 없다는 인식도
작용했다.
그러나 기자가 한달 여에 걸쳐 중정 당시 지휘 계통은 물론 당시 각계
인사들을 두루 취재한 결과, 김재규 중정 부장이 김형욱 제거를 지시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약했다. 사건 당시 중정 해외 담당 라인은 김재규
부장-윤일균 해외담당 차장-김관봉 해외정보국장-이종찬 해외정보국 부국장으로 이어진다. 파리 현지 중정 조직은 이상열 공사-최용찬 참사-황규웅
참사였다.
김형욱씨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직후 김재규 부장의 지시를 받아 이 사건에
대한 첫 조처를 취한 사람은 김관봉 해외정보국장이었다. 당시 그는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의 정보를 책임지고 있었다. “김형욱 실종 사건 보고를
받고 김재규 부장은 깜짝 놀라서 즉각 경위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김관봉 당시 국장이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비망록에는 김형욱이 실종된 직후인
10월16일부터 18일 까지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적혀 있다.
10월16일
‘이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사실 보도는 막지 말라. 다만 추측 보도는 막도록 하라’, 10월17일 ‘부장님 지시: 정상 루트로 알아보라,
정상대로 확인할 것은 다 확인해 보라. 다 알아보되 너무 들쑤시지 말고 바깥에 이상하게 비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10월18일 ‘이상열 공사 NW(노스웨스트 항공)로 19:20 도착’
김관봉
해외정보국장의 주장대로라면 김형욱씨가 실종된 후 김재규 부장이 파리 주재 이상열 공사를 긴급 소환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공사는 서울 시청앞
플라자 호텔에서 이종찬 부국장과 김갑수 부장비서실장의 조사를 받은 뒤 이튿날인 10월19일 파리로 되돌아갔다. 이로 미루어보면 김재규 부장과
중정 해외담당 계선에서는 김형욱 실종 사건의 진실을 알아보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인 셈이다. 윤일균 당시 해외담당 차장도 최근 기자와 만나
“우리는 당시 김형욱 실종을 책임지고 파헤쳐야 할 입장이어서 신속하게 진상 조사를 시작했는데 10·26 사건이 터지면서 유야무야 되었다”라고
말했다.
파리 주재 이상열 공사가 10·26 사건이 나기 1주일여 전인 18일에
비밀리에 귀국해 조사를 받고 돌아갔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일각의 주장처럼 김재규 부장이 파리 현지 중정 조직을 책임진 이상열
공사에게 김형욱 제거를 비밀 지시했더라면 그를 불러 직접 성공 여부를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시 귀국한 뒤 김재규 부장은 만나지 못하고
이종찬 부국장 등의 조사만 받고 되돌아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며칠 후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할 결심을 하고 있던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대통령과 유신 체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김형욱을 제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1979년 10월로 접어들면 김재규 부장은 중정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한다. 국내에서는 일찌감치 차지철 경호실장이 각 부처와 국회에 나가있던 중정 조정관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실제 9월 말까지 김재규 중정 부장을 매일 맨 먼저 독대하고 정보 보고를 받던 박대통령은, 10월 들어서 차지철 실장을 맨 앞 순서에 배치하더니, 중순을 넘어서면서부터 중정 부장의 보고 순서는 오후 3시 이후로 밀리기까지 했다. 이는 최근 공개된 10·26 이전 박대통령의 주요 면담 일지를 통해 밝혀졌다.
분명한 사실은 박대통령이 1978년에는 중앙정보부를 이용해 김형욱 회고록 저지 공작을 폈다는 사실이다. 이때 박대통령은 김재규 부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윤일균 차장에게 미국으로 가서 김형욱을 만나 회고록 중지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윤일균 당시 차장은 이에 대해 “박대통령으로부터 뉴욕에 다녀오라는 전화를 내가 직접 받고 미국에 건너가 50만 달러를 김형욱에게 건네고 원고를 받아왔지만 김형욱이 배신해 나만 큰 망신을 당했다”라고 회고했다.
이같은 증언으로 보더라도 박대통령이 애가 닳아 중정 차장을 직접 동원한 회고록 저지 공작이 실패로 돌아갔는데 다시 차장의 상급자인 김재규 부장이 나서서 김형욱을 제거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부장은 당시 10·26을 준비하고 있을 때여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남아 있지 않던 상황이었다. 박대통령이 중정에 맡긴 회고록 저지 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뒤 또다시 중정에 암살 공작을 맡겼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이같은 정황이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형욱 제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도 김형욱 제거와 같은 작전은 중정의 해외 정보 조직 도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해외정보국의 한 간부는 ‘프랑스 현지 정보부 요원들이 김형욱 납치에 개입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청와대 경호실 쪽에서 김재규-윤일균-김관봉- 이종찬으로 이어지는 정보부 지휘 계통을 유린했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김형욱 현지 암살팀원이었다고 털어놓은 이○○씨의 증언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1979년 초 내가 청와대에 들어갔다 나온 뒤 중정에서 나를 관리하던 윗선도 나의 파리행을 모르고 있었고, 나도 보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