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유회사, 민간 항공사보다 비싸게 판매"
조달본부, 원가산정팀 신설해 분석 착수
이 의혹이 커지자 조달본부는 여덟 차례에 걸쳐 대책 회의를 열고 조달본부 물자부 산하 물자원가1과에 군용 항공유 원가를 산정하는 원가산정팀을 신설했다. 원가산정팀은 4급 군무원 이철원 팀장을 비롯해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달본부는 이와 함께 삼일회계법인에 항공유 원가 산정 방식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감사원 4국 5과도 항공유 고가 구입을 비롯해 군수 조달 분야에 대한 감사 계획을 세우고 정밀 감사에 들어갔다.
지난해 11월 국회 국방위원회의 국방부 감사에서 이 사실이 처음 제기되었는데, 입증 자료가 없어 국정감사장에서 ‘튀고’싶어하는 국회의원의 일과성 지적으로 치부되어 넘어갔다. <시사저널>은 그 후 국방부 조달본부와 정유사 사이에 오간 내부 자료와 조달본부의 공문을 입수했다. 이 자료에는 그 동안 국방부 조달본부가 항공유 고가 도입에 대응한 조처와 정유회사가 국방부 조달본부에 보고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이 자료에는 지난 몇 년 동안 정유회사가 군에 납품한 항공유 물량과 가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올해 각 군에서 쓰는 항공유를 구입하기 위해 할당된 예산은 1천2백3억원. 각 군이 구입하는 기름 가운데 항공유 구입비가 44%로 제일 많다. 구입 업무를 총괄하는 곳은 국방부 조달본부. 조달본부는 국내 5개 정유회사에 납품 희망 수량과 가격을 제출하게 하는 희망수량단가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 경쟁 입찰 방식에 따라 최저가를 적은 업체 순서대로 납품 물량을 배정한다.
희망수량단가제를 통해 군용 항공유로 도입되는 연료는 JP 8. 실내에서 사용하는 등유에 갖가지 첨가물을 넣어 만든다. 산화방지제·금속불활성제(정전기 방지 첨가물)·동결방지제(AIA·Anti-Icing Agent)·부식억지제 등이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소속 여객기가 사용하는 항공유인 JET-A1에는 동결방지제와 부식억지제가 없다. 민간 항공사 연료 탱크는 극저온에서 유류가 어는 것과 부식을 막을 수 있는 연료 필터와 히터를 장착하고 있어 동결방지제와 부식억지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용 항공기에는 연료 필터와 히터가 없다. 따라서 극저온에서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군용 항공기는 연료의 결빙을 막는 동결방지제와 연로가 썩는 것을 막는 부식억지제가 든 연료가 필요하다. 정유업체가 국방부 조달본부에 제출한 보고 자료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JP 8의 제조 원가는 JET-A1보다 ℓ당 1.23원 비싸다. 하지만 올해 군에 납품되는 JP 8의 가격은 민간 항공사가 구입하는 JET-A1 가격보다 ℓ당 82.48원이 비싸다. 지난해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하면, 그 차이가 1백7원으로 벌어진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하경근 의원이 “지난해 국내 정유사가 각 군에 JP 8을 납품하면서 4백98억 원이 넘는 부당 이윤을 챙겼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밀 감사를 실시하고 있는 감사원도 조달본부에 국제가와 계약가의 차액을 환수하라고 요구했다. 국내 정유회사는 차액 환수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조달본부는 지난 2월21일 서둘러 다시 군용 항공유 경쟁 입찰을 실시했으나 정유회사들이 국방부 예정가에 맞는 입찰가를 쓰지 않아 유찰되었다. 3월7일 재입찰을 하는데 다시 유찰되면 원가를 검증한 후 입찰할 계획이다. 조달본부는 정유사 신고 가격 대신 분석 적정원가 산정 방식을 도입해 항공유 가격을 책정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조달본부는 원가를 분석해 정유회사가 부당 이익을 챙겼다고 판단되면 국고 환수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물자부 물가원가1과 산하에 원가산정팀을 꾸려 항공유의 원가를 산정하려 했다. 하지만 이철원 원가산정팀장은 “기본적으로 항공유 원가를 산정하기가 힘든 데다 정유회사가 자체에서 작성한 원가 계산 기초 자료는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제출하기 꺼려 원가를 따져보기가 힘든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원가산정팀은 지난해 11월29일 국내 5개 정유사에 공문을 보내‘계약 단가의 적정성 문제가 제기되어 적정 가격을 판단하고자 하니 원가 계산 기초 자료를 1999년 12월7일까지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조달본부가 요구한 원가 계산 기초 자료는 1999년 최초 계약시 제조 원가 계산서, 1998년 재무제표·유종별 다른 기관 거래가와 시중 거래가 등이다.
정유회사들, 원가 계산서 제출 안해
국내 정유회사들은 지난 몇 년 동안 통용된 원가 산정 방식만 제시하며 가장 중요한 제조 원가 계산서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 SK주식회사 김동원 직매팀장은 “항공유는 연산품(43쪽 상자 기사 참조)이어서 원가 계산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방부 조달본부가 요구하는 원가 산정 방식에 적합한 기초 자료를 제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연산품은 같은 원료를 같은 공정을 거쳐 처리했을 때 가치가 다른 두 가지 이상의 품목이 만들어지는 제품이다. 원유를 증류하면 비등점에 따라 경유·중유·등유·휘발유·LPG(액화석유가스)처럼 가치가 다른 여러 품목이 생산되는 석유화학 제품이 대표적인 연산품이다. 품목별 원가 산정이 어려워 영업팀이 석유 제품 판매 가격을 시장과 구매자가 처한 조건에 따라 그때그때 결정한다. 김동원 직매팀장은“산업자원부가 제시한 가격 결정 기준에 맞춰 산정한 기준 가격에 근거하지만, 전체 석유 제품의 판매 가격은 영업팀이 결정한다”라고 말한다.
구입 기관마다 항공유 가격이 달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올해 1월 군에 납품된 JP 8은 ℓ당 3백30.3원이나 경찰청·해양경찰청·산림청은 3백63.21원에 구입하고 방송국과 삼성항공은 4백76.84원에 사들이고 있다. 민간 항공사는 2백47.55원이다. 따라서 국내 방송국들은 대한항공보다 ℓ당 1백30원 가량 비싸게 JP 8을 구입하는 것이다. 정유회사가 기관별 납품가를 비밀로 하기 때문에 구매 기관은 JP 8을 다른 기관과 비교해 얼마나 비싸게 구매하는지 모르는 형편이다.
LG칼텍스정유 이병무 부장은 “JET-A1과 JP 8은 시장이 다르다. 민간 항공사에는 싱가포르 현물 시가(MOPS)를 기준으로 JET-A1을 판매하지만 국방부 조달본부에는 국내 실내 등유 가격에 맞춰 팔고 있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현물가는 덤핑 가격에 가깝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모든 항공유가를 결정하면 정유업계가 망한다고 국내 정유회사는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정유회사가 공공기관과 제조업체에 항공유을 비싸게 공급해 민간 항공사와 거래하면서 입은 손해를 보전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국내 정유회사가 민간 항공사에 공급하는 JET-A1 물량은 29억ℓ에 이른다. 하지만 JP 8의 공급 물량은 5억8천ℓ 가량이다. JET-A1 공급 물량이 JP 8보다 5배 가량 많은 셈이다. 국내 정유회사가 JP 8 시장에서는 정상 가격을 받으면서 시장 규모가 5배나 큰 JET-A1 시장에서는 손해 보고 판다는 것이다. SK주식회사 김동원 직매팀장은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은 알지만 잉여분을 처리해야 하는 정유회사로서는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민간 항공사가 JP 8도 JET-A1 가격으로 산다는 점이다. 민간 항공사는 소속 여객기가 기상 악화처럼 비상 사태를 맞아 공군 기지에 불시착해 연료가 부족할 때는 군으로부터 JP 8을 지원받는다. 민간 항공사는 군에서 얻어 쓴 JP 8을 나중에 현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정유회사로부터 같은 양을 사서 상환해야 한다. 정유회사는 민간 항공사에 현물 상환용 JP 8을 JET-A1 가격에 공급한다. 민간 항공사는 JP 8을 지난해 ℓ당 1백7원이나 싸게 구입한 것이다.
국방부 조달본부에 보고한 자료에서 SK주식회사는 ‘… 정유사가 민간 항공사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민간 항공기용 JET-A1 가격으로 (JP 8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유회사가 손실을 감수하고 민간 항공사에 항공유를 공급하면서 서비스 차원에서 비싼 군용 항공유를 싸게 공급한다는 것이다. 손해보겠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조달본부가 묵인” 주장도
SK주식회사 김동원 직매팀장은 “민간 항공사가 구입하는 JP 8 물량은 미미하다”라고 말했다. 국방부 보고 자료에서도 SK주식회사는 연 100만ℓ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국방부 조달본부 장 희 물자부장 역시 국회 국방위에서 하경근 의원에게 “민간 항공사가 구입하는 JP 8 물량은 80만ℓ이고 금액으로는 5천만 원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 보고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항공유 상환 현물 물량은 1999년 3/4분기까지에만 500만ℓ가 넘었다. 4/4분기 상환 물량까지 계산했다면 600만ℓ를 훨씬 넘게 된다. 이 수치는 조달본부가 아니라 국방부가 직접 국회 국방위에 제출한‘육·해·공군의 1997∼1999년 분기별 상환 물량’에 나와 있다. 이 보고 자료는 조달본부가 착각을 일으켰거나 허위 축소 보고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하경근 의원은 “조달본부가 허위 축소 보고했다”라고 주장했다. 국내 정유회사가 부당 이윤을 챙긴 것을 조달본부가 묵인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97년 유가 자유화 조처가 시행되어 정유회사의 가격 결정 재량권이 커지면서 군용 항공유 가격과 민수용 항공유의 가격 차이(42쪽 도표 참조)는 눈에 띄게 커졌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무튼 1997년에는 국제가 기준인 JET-A1이 국내가 기준인 JP 8보다 다소 비쌌으나 1998년 2월에 사전 신고가에서 통보가로 바뀌면서 가격이 역전되어 JP 8 가격이 JET-A1 가격보다 ℓ당 72원 비싸졌다. 지난해 그 차이는 1백7원까지 벌어졌다. 이 자료는 국방부 조달본부가 지난 2월23일 하경근 의원에게 보고한 ‘항공유 관련 진행 업무’라는 보고서에 나온 수치이다.
이 가격 차이는 올해 1월 82.48원으로 좁혀졌다. 지난해 11월 국회 국방위의 국방부 감사에서 군납 항공유가 민수용 항공유보다 비싸다는 것이 드러난 뒤 가격이 떨어진 것이다.
조달본부 원가산정팀의 의뢰를 받은 삼일회계법인이 조사·분석한 결과를 통보하면 조달본부가 후속 조처를 내놓을 것이다. 조달본부는 이 작업이 2∼3개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정유회사도 항공유 가격 결정 방식에 대한 연구를 에너지경제연구원에 의뢰할 계획이다. 이 결과는 올해 9월께 나온다. 정유회사는 이 연구 결과에 근거해 대응 방안을 모색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