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 명예·사기와 직결된 문제를 보수가 숨기는 아이러니
“당론까지 정해서 과연 무엇을 지켰는가. 그 당론이 진정 옳은 것이라면, 진정 부끄럽지 않다면 나를 징계하라. 나는 찬성했다.”(김웅 의원), “당장에 손해처럼 보이는 일도 그것이 훗날 국민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남는다면 그 일을 해야 한다.”(김근태 의원)
5월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진행된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다고 밝힌 국민의힘 의원들의 말이다. 국민의힘은 이날 본회의 재표결을 앞두고 ‘부결’을 ‘당론’으로 정했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비상 의원총회에서 “특검법은 민주당이 정쟁과 분열을 위해 만든 악법이다. 민주당이 만들고, 민주당이 수사하는, 민주당을 위한 악법”이라며 “국민의힘은 집권여당으로서 법치주의에 입각해 판단해야 한다. 단일대오의 각오로 임해 달라”고 호소했다.
국민의힘 지도부의 표 단속 결과, 더불어민주당이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재의결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초 국민의힘에서는 17표 이상 이탈하면 법안이 통과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고, 민주당도 국민의힘에서 최소 10표는 이탈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막상 여당 내부의 그러한 움직임은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무기명 투표 결과 찬성 179표, 반대 111표, 무효 4표로 특검법은 부결됐다.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한 법안이 다시 통과되기 위해 필요한 196표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탈표 단속’ 성공한 與…野, 22대 국회에서 재추진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밝힌 여당 의원 5명을 더하면 찬성표가 184표 나와야 했지만, 5표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국민의힘 의원 5명은 소신대로 찬성표를 던지고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왔을 가능성도 있고, 국민의힘 의원들이 찬성까지는 못 하고 무효표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국민의힘은 단일 대오를 지키는 데 성공했고 민주당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표결 결과가 나온 후 국민의힘은 “거야(巨野) 폭주에 맞선 단일대오의 결과다. 이탈표 단속에 성공했다”고 했다. 대통령실에서는 “당과 대통령실은 국가 대의를 위한 책임을 다하는 공동운명체”라며 안도하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만약 이번 표결에서 여당에서 이탈표가 다수 나왔다면 ‘윤 대통령의 레임덕’으로 해석되었을 것이기에 용산으로서는 일단 한 고비를 넘긴 셈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결과만 놓고 말하는 단견들이다. 채 상병 특검법은 끝난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여권 세력 전체가 여론의 부담을 더 크게 안게 됐다. 당장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제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해병대원 특검법을 재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22대 국회에서 실제로 야권이 채 상병 특검법을 다시 발의해 통과시키고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 해도 여권의 사정은 21대 국회보다 열악하다. 재의결에서 반대표를 던질 국민의힘 의석수가 108석에 불과해 이탈표가 조금만 나와도 재의결이 가능해진다.
그런 상황까지 가려면 시간은 걸릴 것이고, 특히 법사위원장을 어느 당에서 차지하느냐에 따라 속도에 차이가 나는 변수도 있다. 하지만 여권을 향한 여론의 역풍은 즉각적일 것이다. 채 상병 특검법에 찬성하는 국민이 10명 가운데 6명을 차지하는 여론의 추이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토마토가 뉴스토마토의 의뢰로 5월25일부터 이틀간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국민 10명 중 6명은 채 상병 특검법 찬성
이에 따르면 ‘국회가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3.7%가 ‘특검법 통과에 찬성해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특검법 통과에 반대해야 한다’는 응답은 25.5%에 머물렀고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0.8%로 조사됐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전에 실시된 여론조사들에서도 비슷한 추이가 나타나곤 했다. 채 상병 특검법에 관한 한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여론전에서 애당초 수세를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그토록 채 상병 특검법에 반대하는 것일까. 물론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수사 중인 사안이니 우선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하고, 특검을 민주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법안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여당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여당이 생각하는 ‘독소조항’에 대해서는 여야 간 협상의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시간을 끌어온 공수처의 수사 결과만 기다리기에는 불거져 나오는 의혹들이 심상치 않다.
당장 윤 대통령이 지난해 8월 해병대 수사단이 채 상병 사망 사건을 경찰에 이첩한 당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과 세 차례 통화한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는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이 임성근 사단장 등을 채 상병 사건 혐의자에 포함시킨 조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하고, 이 전 장관이 박 대령을 항명 혐의로 수사하라고 국방부 검찰단에 지시한 무렵이었다.
윤 대통령이 이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건 직후에 박 수사단장의 보직 해임이 이뤄졌고, 경찰에 이첩된 사건을 군이 다시 회수하는 이례적인 상황도 벌어졌다. ‘VIP 격노설’이나 ‘대통령실의 수사 외압설’이 힘을 받게 되는 내용들이다.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여당의 반대가 강할수록, 정말로 VIP까지 관련된 수사 외압이 있었기에 특검을 막으려는 게 아니냐는 시선이 늘어나게 돼있다.
군의 작전 도중에 안전 대책이 부재함으로써 젊은 장병이 숨진 것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다. 군의 명예나 사기와 직결된 사안이기에 보수정부와 보수정당이 앞장서서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일이다. 여권 입장에서도 정면으로 털고 가는 것이 낫다.
그런데 국민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반대 광경이다. 최근 강원도 인제의 모 부대에서 군기훈련을 받던 훈련병이 쓰러져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사망한 훈련병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도는 군기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완전군장 상태로 팔굽혀펴기도 지시받은 것으로 알려져 가혹한 규정 위반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육군은 조사를 마치고 민간 경찰에 해당 사건을 수사 이첩한다고 한다. 채 상병 사망의 진상과 책임 소재가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니 또 다른 죽음에 대한 진상도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까를 떠올리는 것은 합리적인 불신이다. 채 상병 특검법이 단지 고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님을 말해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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