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 축구’ 클린스만 감독, 2001년생 동갑내기 유럽파 중용
“1대0으로 이기는 것보다 4대3으로 이기는 것을 더 선호한다.” 새롭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A대표팀)을 이끌게 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취임 기자회견에서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공격 축구에 대한 소신이었다. 1990년대 ‘전차군단’ 독일의 간판 골잡이로 활약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그는 지도자로 변신한 후에도 공격적인 축구를 지향했다.
지난 3월 열린 콜롬비아, 우루과이와의 친선전을 통해 A대표팀 취임 후 자신의 축구를 처음 선보인 클린스만 감독은 2연전을 통해 공격 축구의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술적 지향점과 방법론을 중시하며 4년 넘게 마이웨이를 외친 파울루 벤투 전임 감독과 달리 시스템의 틀보다는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그의 축구였다.
긴 패스나 크로스 비중을 늘리며 공격 전개 속도를 높이고 선수들의 전진성을 강조한 역동적인 공격 축구에 팬들도 긍정적 평가를 남겼다. 미드필더 역시 상대 문전까지 깊숙이 들어가 골문을 위협했다. 우루과이전에서 페널티박스에 진입해 득점을 올린 황인범은 “공격으로 나갈 때는 과감하게 슈팅까지 마무리하는 걸 원하신다”고 감독의 주문을 전했다.
손흥민에게 ‘자유’ 선사하며 파괴력 극대화
지난 수년간 대표팀의 화두 중 하나였던 손흥민 활용법도 일찌감치 답을 제시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자신의 데뷔전부터 손흥민을 2선 중앙에 포진시켰다. 다양한 공격 옵션을 지닌 손흥민의 파괴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도록 했다. ‘자유’를 ‘선사’받은 손흥민은 전방과 측면을 자유롭게 오가며 공격을 주도했고, 콜롬비아를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했다. 손흥민이 A매치에서 멀티골을 기록한 것은 2019년 10월 스리랑카와의 월드컵 2차 예선 이후 3년5개월 만이었다.
콜롬비아전이 손흥민의 역량 극대화를 확인한 경기였다면, 우루과이전은 이강인이 차세대 에이스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경기였다. 콜롬비아전에서 이강인을 후반에 투입해 30분가량 뛰게 했던 클린스만 감독은 우루과이전에는 선발 출전시켰다. 이미 소집 후 인터뷰에서 “이강인의 재능을 잘 안다. 앞으로 출전시간을 계속 늘릴 것이다”며 본격적인 기용을 예고했던 만큼 우루과이전 선발 출전은 자연스러웠다.
콜롬비아전과 우루과이전에서 이강인은 평소 위치인 2선 중앙이나 왼쪽 측면이 아닌 오른쪽 측면에 모두 배치됐다. 스페인 리그 라리가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왼발을 이용한 이강인 특유의 예리한 크로스와 침투 패스를 활용하는 방식과 궤를 달리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흔히 말하는 ‘반대발 윙어’로 이강인을 활용했다. 경기 중 반대편의 이재성과 위치를 바꾸는 사이드 체인지, 중앙의 손흥민과 교차로 움직이는 스위칭 플레이도 있었지만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파고드는 플레이가 주 패턴이었다.
오른쪽 측면에서도 이강인의 위력은 돋보였다. 공이 발에 붙은 것 같은 정교한 볼 터치를 통해 상대 수비 2명을 제치고 들어가는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흔들었다. 이강인이 탈압박으로 상대 수비 조직을 깨면서 다른 동료들에게 공간이 생기는 효과였다. 최근 소속팀 마요르카에서 오른발을 이용하는 플레이 비중을 늘리고 있는데, 우루과이전에서도 상대 수비의 예상을 깨고 오른발로 치고 나가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며 왼발만 막으면 된다는 인식을 날려버렸다.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는 왼발 패턴과 측면으로 치고 나가는 오른발 패턴 모두 가능해지면서 ‘반대발 윙어’ 이강인은 좀처럼 막기 어려운 선수가 됐다. 클린스만 감독은 우루과이전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강인은 상대에게 많은 어려움을 줬다. 그를 막을 방법은 파울뿐이었다”고 극찬했다. 피지컬적으로 한층 성장한 이강인은 상대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얼굴은 여전히 앳되지만 플레이에서는 성숙미가 넘쳤다.
사실 클린스만 감독은 지난 카타르월드컵에서도 이강인의 활약을 주의 깊게 지켜본 바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연구그룹(TSG) 핵심 인사로 월드컵을 관전한 클린스만 감독은 한국 경기를 모두 지켜보며 분석했다. 당시 아르센 벵거 TSG 위원장과 함께한 세미나에서 그는 이강인 투입 이후 한국이 공격 국면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봤다.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지듯 한층 견고하고 간격이 좁아진 수비 전술을 부수기 위해서는 측면 공간을 중심으로 한 개인 전술이 중요한데 한국팀에서는 후반 조커로 투입된 이강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평가였다.
빠른 템포의 역동적 축구 이끄는 밀레니엄 듀오
벤투 감독은 성인 축구에 완벽히 적응하며 마요르카의 전술적 핵이 된 이강인을 외면해 적잖은 비판을 받았다. 카타르월드컵에서 이강인을 경기 양상을 바꾸는 변속기어로 활용해 성과를 냈지만, 선수가 소속팀에서 본궤도에 이미 오른 상태에서 너무 뜸을 들였다는 지적이 있었다. 반면 클린스만 감독은 카타르월드컵에서 얻은 전술적 교훈을 이강인 활용에 확실히 접목하고 있다.
최전방에서는 오현규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벤투호의 확실한 붙박이였던 황의조, 카타르월드컵의 신데렐라 조규성이 버티는 가운데 오현규가 무서운 성장세로 두 선배를 위협하는 양상이다. 클린스만 감독은 콜롬비아전엔 조규성, 우루과이전엔 황의조를 선발 출전시켰고 2경기 연속 후반에는 두 선수를 대신해 오현규를 투입했다.
카타르월드컵에는 안와골절 부상 여파가 있는 손흥민의 몸 상태에 대비한 예비선수로 참가했던 오현규지만 이후 3개월 사이에 무서운 성장을 했다. 지난 1월 스코틀랜드의 명문 클럽 셀틱FC로 이적한 것이 중요한 동기부여였다. 이미 K리그에서도 1년 사이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던 오현규는 셀틱에서도 흐름을 이어갔다. 185cm, 83kg의 체구에서 나오는 탱크 같은 저돌성, 힘 있는 수비에도 밀리지 않는 특유의 낮은 무게중심,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면 망설임 없이 슈팅으로 연결하는 과감성은 유럽에서도 통했다.
후반 교체로 뛰며 짧은 시간 그라운드를 밟았음에도 리그에서 2골, 컵대회에서 1골을 기록한 오현규는 그 기세를 클린스만 감독 앞에서도 보여줬다. 조규성과 황의조는 2선에서 뛰는 손흥민이 파고들 공간을 만들기 위해 상대 수비수를 끌어내는 데 더 집중하다 보니 슈팅을 기록하지 못했다. 반면 오현규는 콜롬비아, 우루과이를 상대로 5개의 슈팅을 기록했다.
그의 강점과 특징을 보여준 건 우루과이전 후반 39분이었다. 이강인의 크로스를 받은 오현규는 빠른 반응으로 오른발 터닝슛을 기록하며 골망을 흔들었다. 비디오 판독 결과 오프사이드로 판정돼 득점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3명의 최전방 공격수 중 가장 결정력이 돋보인 장면이었다. 클린스만 감독은 오현규에 대해 “골에 대한 배고픔을 갖고 있다. 플레이가 간결하다.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2001년생인 이강인과 오현규는 클린스만 시대를 맞은 A대표팀의 새 간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당장은 내년 1월 열리는 아시안컵 우승이 목표지만 결국 종착지는 2026년 열리는 북중미월드컵이다. 클린스만 감독 스스로 “월드컵에 가는 것이 아닌, 월드컵에서 더 높은 위치로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장은 손흥민, 황의조, 이재성 같은 1992년생들이 대표팀의 주축이지만 2026년에는 30대 중반에 접어든다. 이강인과 오현규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 주역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