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프간 장악 후 두 달도 안 돼 공포정치 본색 드러내

지난 8월15일 수도 카불에 입성해 아프가니스탄을 사실상 장악한 지 한 달 반 정도 지나면서 탈레반이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1996~2001년 1차 통치 시절 보였던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른 중세적 통치가 돌아왔다는 신호가 줄을 잇는다.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윤곽도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교육 억압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인 카불대에 신임 총장으로 부임한 모하마드 아슈라프 가이라트의 조치는 상징적이다. 그는 이 대학에서 여성들이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을 전면 금지하고 여학생과 여성 교수를 내쫓았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따르면, 가이라트는 트위터에 “이슬람 우선주의”를 선언하면서 여성 활동을 막았다. 탈레반 무장대원 출신의 가이라트는 마드라사를 운영한 것이 교육 경력의 전부다. 마드라사는 쿠란 학교가 딸린 모스크(이슬람사원)다. 그런 그의 여성 추방은 과거 악명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AP 연합
9월24일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무장한 한 탈레반 전사가 남성 시민들이 참석하는 금요일 기도를 주도하고 있다.ⓒAP 연합

중세 ‘샤리아’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회귀

탈레반은 오랫동안 아프간과 이웃 파키스탄에서 폭력적으로 여성 교육을 막아왔다. 상징적인 사건이 2012년 10월9일 아프간과 가까운 파키스탄 서북부 스와트 밸리에서 벌어졌다. 탈레반 암살자는 스쿨버스를 탄 여학생 말랄라 유수프자이의 머리와 얼굴, 그리고 어깨에 세 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SNS를 이용해 아동 억압에 저항하고 여성 교육권 쟁취운동을 벌이던 유수프자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2015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9월29일 아프간 여성 의료 종사자와 교사 등이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2만의 여성 교육자와 1만4000여 여성 의료 종사자가 지난 두세 달 동안 급료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급료 체불은 아프간이 처한 경제문제와 함께 여성 교육과 사회활동을 말살하겠다는 탈레반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포정치도 돌아오고 있다. 앞서 9월25일 탈레반은 서부 헤라트에서 교전 중 사망한 납치범이라며 기중기를 이용해 남자 4명의 시신을 중앙광장에 걸어뒀다. 탈레반의 이런 공포정치는 1996년 소련에 맞서 싸웠던 군벌과 무자헤딘 세력을 몰아내고 수도 카불에 입성한 뒤 가장 먼저 취했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탈레반은 소련 점령(1979~89년) 아래의 괴뢰정권에서 마지막 대통령을 지낸 무함마드 나지불라를 잔혹하게 공개 처형하고, 대통령궁 앞에 한동안 걸어뒀다. 중세식 겁주기다.

9월24일에는 탈레반 세력의 핵심 인물인 누르딘 투라비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샤리아에 따른 사형 집행과 손발 절단형 같은 형벌의 부활을 주장했다. 그는 1차 통치 당시 법무장관과 함께 샤리아를 사회적으로 적용하며 사회 풍속을 통제하는 권선징악부 수장을 지낸 강경파다.

중세 샤리아는 중범죄자에게 참수형을 내리고 강도는 손발을, 절도범은 손목을 각각 자르는 신체 절단형, 간음죄를 범한 사람에겐 투석형을 각각 적용했다. 현재 이를 적용하는 이슬람 국가는 드물다. 하지만 탈레반은 1차 집권기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 처형을 하는 등 중세 수준의 잔혹한 형벌을 실제로 적용했다.

투라비의 발언은 아프간을 중세 샤리아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되돌리겠다는 의미다. 탈레반은 카불 입성 뒤 여성부를 폐지하고 권선징악부를 부활시켰다. 샤리아로 사회 풍속을 통제하고 이를 위해 가혹한 형벌을 수단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셈이다. 탈레반은 심지어 남부 헬만드주에서 샤리아에 따른다며 이발사들의 면도와 수염 다듬기를 금지했다고 9월27일 BBC방송이 보도했다. 일맥상통하는 사회 통제다.

이는 1차 통치 당시 탈레반의 행동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당시 그들은 여성 교육과 사회활동을 모두 막은 것은 물론 남녀 모두에게 음악·영화·방송은 물론 인터넷도 금지했다. 우상 숭배라며 사진과 그림도 걸지 못하게 했다. 이란이 최고지도자의 사진을 공공 사무실에 걸어두는 것과도 사뭇 다르다.

 

“현대 세계는 불신자로 오염됐다”며 밀어붙여

축구와 체스를 포함한 스포츠와 오락, 심지어 어린이들이 즐기는 연날리기나 애완동물 사육도 못 하게 했다. 시대착오란 점에서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 닮았다. 현대 세계는 불신자로 오염됐으니, 초기 이슬람 시대로 돌아가자는 이런 조치들은 국제적으로 거부감을 키웠다.

그런데도 탈레반은 왜 다시 샤리아 통치 회귀를 선언했을까? 배경으로 주목되는 것이 최고지도자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다. 아쿤드자다는 9월7일 과도정부 내각 발표 뒤 내놓은 성명에서 “앞으로 아프간의 모든 삶의 문제와 통치 행위는 신성한 샤리아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 탄생지인 남부 칸다하르에 머무르는 그가 카불 장악 뒤 처음 내놓은 성명에서 샤리아 통치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탈레반의 신앙·신념 체계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탈레반은 19세기 영국이 지배하던 인도에서 나온 데오반디 운동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그리고 아프간 인구의 42%를 차지하는 파슈툰족의 종족 규범인 파슈툰왈리, 이 세 가지에서 나온 신념 체계로 볼 수 있다. 데오반디는 ‘이슬람 부흥’으로 외세에 대항하고, 와하비즘은 ‘유일신 신앙’이라는 이슬람의 원래 신앙으로 돌아가며, 파슈툰왈리는 남성 중심의 ‘부족 규범’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개념이다. 이런 탈레반의 머릿속을 요약하는 상징적 용어가 바로 ‘샤리아’다. 샤리아에 의한 통치는 현대 ‘이슬람주의’ 정치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탈레반은 서구 기준의 국민 복리, 경제발전, 국제사회 편입, 현대화 등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완고하게 샤리아 우선주의를 추구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1996~2001년 1차 통치를 했던 탈레반은 미군의 침공으로 지난 20년간 게릴라전을 벌이고 카타르에 사무실을 운영해 미국과 협상하면서 권력을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다른 세력과 손잡기도 했으며, 인구의 27%를 차지하는 아프간 제2 민족인 타지크족도 받아들였다. 주목할 점은 외세와 세속정권을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은 탈레반이 자신들의 신념체계를 이루는 데오반디·와하비즘·파슈툰왈리를 포기하거나 개량하겠다는 어떠한 의사도, 의향도 밝힌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탈레반은 신앙·신념 체계가 분명한 집단이며, 20년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승리자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손을 뗐으며, 이 척박한 땅에 어떤 간섭을 시도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지금으로선 국내외 어디에도 탈레반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 그들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핵심 요인이다.

서구 언론은 탈레반 과도정부의 각료나 차관에 여성이 한 명도 없다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는 서구가 아직도 그들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볼 수밖에 없다. 탈레반은 결국 탈레반이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