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파 무장공작원 출신 김신조의 최후 인터뷰
생애를 총정리하게 된 계기는.
“대한민국에 온 지 53년이 지났다. 부모·형제도 친척도 없이 외길을 걸었다. 1·21사태에서 살아남아 남한에 정착해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이 악물고 무섭게 살아왔다. 언젠가는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밝히는 날이 올 거라 믿었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다.” 서울 구로구 서울성락교회에서 김 목사를 만난 5월20일은 공교롭게도 문재인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위해 미 워싱턴DC에 도착한 날이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기대 이상의 외교 성과를 낸 동시에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각인됐다. 두 정상이 한국전쟁 참전용사 명예훈장 수여식에 나란히 참석해 무릎 꿇고 기념사진을 찍은 장면도 큰 화제를 모았다. 그야말로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이벤트였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환기는 자연스레 53년 전 김신조 목사가 스스로에게 한 질문과 중첩된다. 김 목사는 1968년 1월21일 ‘박정희 대통령 멱을 따는’ 데 실패하고 포위돼 자폭하기 직전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다. 이어 북한 체제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무를 떨쳐내고 살고 싶다는 욕망을 택했다. 자폭용 수류탄을 내려놓고 투항한 것이다.투항 전후 상황 중 그간 알리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
“(투항 이틀 전인) 1968년 1월19일 나를 비롯한 북한 정찰국 124군 부대원 31명이 경기도 파주 야산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을 때 나는 (교본대로)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수결에 따라 우씨 4형제를 풀어줬고, (그들이 산에서 내려가 신고하면서) 한국군에 비상이 걸려 작전이 시작됐다. 내 머릿속에서 ‘이건 실패다’라는 판단이 스친 순간이다. 박정희 대통령 사살이라는 목표가 싹 사라지는 한편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동료들에게 내색하진 않고 같이 갔다. ‘혁명의 변절자’로 몰려 동료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 있어서다. 향후 교전이 벌어지면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124군 부대원들은 1월21일 밤 10시쯤 창의문(자하문) 고개에서 경찰과 교전한 뒤 더 돌격해 들어가다가 이번엔 군과 만났다. 장갑차, M16 소총 등으로 무장한 한국군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나는 빠져나왔다. 이미 도주로를 북한과 가까운 북쪽의 북악산이 아닌, 반대편인 남쪽으로 잡아놓고 있었다. 경복고를 지나 인왕산으로 뛰었다. 인왕산에 올라가 보니 서울 시내가 조명탄 때문에 대낮처럼 밝았다. 곳곳에서 총소리도 들렸다. 좁혀오는 포위망 속에서 군경과 조우했을 때 싸우겠다는 건 미련한 계획이다. 개인 무기 2정과 실탄 350발, 수류탄 13개를 인왕산 기슭 바위 밑에 숨긴 후 수류탄 1개만 들고 이동하다가 수색 중이던 군인들에게 발각됐다.”포위됐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상세히 설명해 달라.
“처음에는 소지한 수류탄 1개로 자폭하려 했다. 바위틈에 숨어 수류탄 안전핀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군인들이 ‘나오면 살려준다’고 하더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또 ‘나는 누구인가’라고 계속 자문했다. 당시 124군 부대원 31명 모두 총각이었다. 처자식이 있으면 혁명을 못 하기에 그렇게 구성됐다. 그런데 차마 수류탄 안전핀을 뽑을 수 없었다. 사상이고 이념이고 떠오르지 않고 원초적인 본능, 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들었다. 천천히 수류탄을 땅에 놓고 손을 들고 나갔다.”그렇게 해 놓고 다음 날에는 기자회견장에서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말해 세간에 충격을 안겼다. 왜 그랬나.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한다. 투항하기 전 동료들과 3박4일 동안 낮에는 쥐 죽은 듯 숨어 있고 밤중엔 시간당 10~12km를 달리며 이동했다. 먹지도 못했다. 조리 과정에서 노출될까봐 식량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하게 훈련받은 특수부대원이라도 못 자고 못 먹으며 살인적인 행군을 소화하는 게 힘들 수밖에 없다. 투항하고 나서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 조사, 현장답사 등 일정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포위당한 동료들을 향해 ‘나와라. 살고 보자’는 회유를 하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생활하던 부대원들의 시체를 (신원 확인을 위해) 목격할 땐 심적으로 고통스러웠다. 더군다나 투항한 나를 ‘체포된 무장공비’로 취급하는 데 대해서는 너무 분통이 터졌다.(아직도 김 목사에 관한 국방부 기록은 ‘체포’로 되어 있다.) 조사와 현장답사 내내 찼던 쇠고랑을 기자회견장에서도 풀지 않으니 성질이 있는 대로 났다. 사실 기자회견 자체가 뭔지도 몰랐고 완전히 전향한 상태도 아니었다. 흥분한 상태에서 ‘임무가 뭐였냐’는 질문을 받자 그런(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다는) 대답이 즉흥적으로 나오더라.”육군 방첩부대(방첩대)에서 수사받을 때 분위기는 어땠나.
“구타나 고문을 당한 적은 없다. 그러나 수사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니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지 않더라. 초반에는 ‘내가 이것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굉장히 고민하고 후회했다.”수사 도중 미군 첩보부대로 넘겨졌다.
“1968년 4월부터 10월까지 수사를 받는데,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북한에서 받은 교육 때문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그러니 수사에 순순히 응했을 리 만무하다. 미군을 때려 지하 감방에 갇혔다가 다시 올라오기도 했다. 1968년 10월쯤 다시 방첩대로 돌아왔다.” 김 목사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사이 1·21사태는 일단락됐다. 군경의 합동 소탕작전 결과 124군 부대원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군경, 민간인 등 38명이 숨지고 52명이 부상당하는 등 우리 측 피해도 컸다. 김 목사는 숨겨둔 총에서 화약 냄새가 나지 않고 총알이 그대로 들어 있는 점 등이 인정돼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교전 중 왜 총을 한 발도 쏘지 않았느냐’고 묻기에 ‘나는 박정희를 죽이러 왔지, 다른 사람을 죽이러 온 게 아니다’고 답했다”며 “임무에 실패했는데, 교전에 참여하고 총을 쏠 이유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김 목사는 정부와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10일 풀려났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아직 요원했다. 그는 일반 사회로 나와서도 시도 때도 없이 국가에 불려가야 했다.풀려난 뒤 어떻게 지냈나.
“직장에 다녔다. 첫 직장은 한국화약(한화그룹 전신)이었다. 정부의 도움으로 취직해 몇 개월 출근하다가 폭파범 누명을 쓸까봐 두려워 그만뒀다. 이후 삼부토건에 입사해 10여 년간 근무했다.”직장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니다. 회사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멀쩡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군에서 수시로 불러댔다. 방첩대가 육군 보안사령부로 바뀌었을 때다. 북한 동향 파악, 특수작전 등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이해하나 도가 지나쳤다. 내 소중한 시간이나 자문에 상응하는 보상은 일절 없었다. 어느 날은 보안사 간부가 나에게 다짜고짜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막 대했다. 나도 감정이 있으니 대꾸했다. 그랬더니 권총을 뽑아들고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하더라(한숨). 북한에서는 좋은 집안 출신으로 한때 혁명가 대접도 받았다. 이후 변절자가 되면서 북한에 있는 내 가족들은 다 잘못(숙청)됐다. 그런데 전향해 온 남한에서까지 이런 취급을 받으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러려고 총 한 발 쏘지 않고 투항하고, 동료 29명이 처참하게 죽은 가운데 살아남고, 남측에 북한 무장공작원 침투·복귀로를 다 알려줬나’ 하며 나 자신을 저주했다.”1·21사태 교전 당시 총을 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숨긴 것도 정부의 압력과 관련 있나.
“대한민국 정부에 협조하면서 모든 걸 정부 입장에서 말해야 했기 때문에 밝히지 않았다. 생각해 봐라. 북한 무장공작원 31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다. 국민이 더는 정부와 군인을 신뢰할 수 있겠나.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는 가운데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게 바로 유일한 증인인 나였다. 내가 투항한 데 대해서도 ‘투항이 아니라 체포’라고 몰아야 국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론 억울했으나 살기 위해서, 또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참았다.”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은 어땠나.
“1971년 10월7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나의 이력에 대해 몰랐다. 아내는 아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없는 나이라고 판단해 한동안 숨겼다. 그런데 초등학교 교과서에 ‘무장공비 김신조’라며 사진까지 떡하니 실려 있는 게 아닌가. 자녀들이 강제로 알게 되고 주위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집으로 온 협박전화를 받기도 했다. 너무 시달리다가 이름을 ‘김재현’으로 바꾸고 이사해도 소용없더라. 아울러 버스나 지하철에서 ‘너 때문에 군 생활이 늘어나고 힘들어졌다’며 상욕을 하거나 ‘김신조가 사실 북한에서 온 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조작으로 탄생한 가상의 인물’이라는 등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힘들어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실제로 북한 무장공작원들의 청와대 습격 시도와 실패, 그리고 유일하게 투항한 김 목사가 살아내며 증언한 모든 것은 당시 세상을 바꿔놨다. 우선 군 복무기간이 3~6개월 늘어났고 적진 침투 능력을 연마하는 유격훈련이 도입됐다.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가 생겼다. 영화 《실미도》로 유명한 684부대도 이때 조직됐다. 파급효과는 비단 군경에만 미친 게 아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군사교육(교련)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은 일반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 압권은 주민등록증의 등장이다.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식별하기 위해 1968년 11월 처음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다. 대한민국 1호 주민등록증을 손에 쥔 사람은 김 목사의 ‘타깃’이었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다. 이런 변화는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삶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이후 단일 사건과 관련 인물이 이 정도 파급효과를 일으킨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1·21사태가 단순히 북한 도발 이력 중 하나가 아니라 국가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대사건이란 방증이다.당신을 통해 많은 변화가 일어난 건 사실이다.
“그 사건(1·21사태)을 계기로 정부가 필요에 의해 바꿨지 내가 한 일은 아니다. 다만 다들 한번 곱씹어보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 경제·안보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 않나. 특히 자기 동네를 지키는 예비군 제도는 북한군의 대한민국 후방 교란 작전을 억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1·21사태 이전의 대한민국은 어땠다고 보나.
“1968년의 남한은 지금과 달리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이 남한보다 훨씬 높았고, 군 장비·시스템 등도 앞서 있었다. 휴전선 방어도 북쪽과 달리 남쪽은 허술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은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고 남한을 완전히 공산화하려 했다. 청와대 습격 후 남한의 육·해·공을 그대로 장악해 버린다는 계획이었다. (투항 당시) 직접 본 남한의 현실을 고려할 때 북한의 계획이 100% 맞았다. 정말 우씨 4형제가 나라를 살렸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들이 바로 신고하지 않았으면 청와대 습격과 남한 공산화는 무조건 성공했을 것이다.”■ 北 청진 출신…‟부모·형제에 죄책감”
27세에 남한으로 와 팔순 맞아
1·21사태 당시 김신조 목사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6기지 2조 조장(소위)이었다. 김 목사와 관련한 유튜브 영상 댓글에는 ‘저렇게 인자한 할아버지가 젊었을 땐 살인 병기였다니’라며 놀라는 댓글이 많이 달려 있다. 극강의 훈련과 실제 특수작전을 소화했던 김 목사는 이제 팔순의 노(老)성직자가 됐다. 그는 “몸무게가 많이 줄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며 “활동하기 힘들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가족을 소개할 때는 활기가 넘쳤다. 김 목사는 남한 정착 후 편지를 주고받던 최정화씨(77)와 결혼해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다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멋지지 않냐. 북한에도 이런 가족은 없을 것”이라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가족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가족은 신앙과 함께 김 목사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그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끝 모를 우울감에 빠지다가도 남한에서 꾸린 가정을 위해 참아냈다.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인 김 목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노동당원이었다. 부모가 정미소를 운영해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이었다고 김 목사는 회상했다. 그는 “부모·형제가 나 때문에 북한에서 숙청당했다”며 “미안함과 죄책감을 품고 나 하나라도 굳건히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나에게 목숨과 자유, 가족을 준 나라”라며 “괴롭고 슬픈 기억이 많지만, 넓고 크게 보고 나라와 내 자손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53년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아내 최씨가 “노병은 살아 있다!”라며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했다. 엷게 웃는 김 목사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