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앙숙’ 된 두 공룡 일촉즉발 위기
무장 강화하며 전쟁 위기감 고조

지난 6월15일 밤, 인도 서북부 잠무·카슈미르주 라다크 지역의 갈완계곡. 이곳에서 중국과 인도 병사 600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를 동원해 6시간 동안 난투극을 벌였다. 일부 병사는 못이 잔뜩 박힌 막대기까지 휘둘렀다. 난투극이 일어난 정확한 배경과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과는 이튿날 인도 측의 발표를 통해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인도 육군은 “중국군과의 충돌로 군인 20명이 사망했다”며 “중국 측도 이번 충돌로 4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6월17일 중국 외교부는 숫자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공식 확인했다. 2017년 8월에도 양국 병사들은 라다크의 판공(班公)호수 부근에서 난투극을 벌인 바 있다. 올해 5월초에도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양국 군사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1975년 이래 45년 만이다. 두 나라는 국경분쟁으로 1962년 전쟁을 치렀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이 잇따랐다. 결국 1996년 국경지대 최전방에 근무하는 순찰대는 총기나 폭발물을 휴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런데도 유혈사태가 또 벌어졌고, 사망자까지 발생한 것이다. 일각에선 충돌이 계속될 경우 양국 간 국지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유혈충돌 후 접경지역에 병력 증강 배치

양국 갈등의 기원은 1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세월 동안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티베트라는 완충지대가 있었다. 하지만 1912년 청나라가 망하고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영국 주도로 국경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13년 인도 시믈라에 영국·중국·티베트 대표가 모였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이듬해 조약을 맺어 인도와 티베트의 대략적인 국경선을 획정했다. 당시 회담을 주관했던 사람이 인도 식민정부의 외무장관 맥마흔이었다. 따라서 획정된 국경선은 ‘맥마흔 라인’이라고 불렸다. 영국과 티베트는 맥마흔 라인을 곧바로 승인했다. 하지만 중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티베트가 중국의 속국이라 독립적인 외교조약을 맺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1949년에는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티베트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1950년 중국은 티베트를 전격 침공해 합병했다. 한동안 중국과 인도는 비동맹주의 세계를 같이 형성하면서 긴밀히 협력했다. 그러나 1959년 티베트에서 일어난 독립봉기가 실패해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양국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 맥마흔 라인에서 국경이 애매했던 세 곳의 문제도 차츰 불거졌다. 먼저 동부의 아루나찰프라데시는 인도가 지배하는데, 면적이 9만㎢로 가장 크다. 중부의 도카라는 2000㎢로, 역시 인도가 지배한다. 서부의 아크사이친은 중국이 지배하는데, 3만3000㎢에 달한다. 세 곳을 두고 갈등하던 두 나라는 1962년 아크사이친에서 전쟁을 벌였다. 중국군의 월경으로 시작된 충돌은 중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당시 인도는 병력, 무기, 훈련량 등에서 중국보다 훨씬 뒤처졌다. 또한 비동맹주의를 견지하느라 서구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인도는 패전 후 국방력 강화와 핵무기 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인도군은 전략핵무기까지 갖춘 대군으로 탈바꿈했다. 지금도 객관적인 군사전력에서는 중국이 인도를 압도한다. 하지만 전면전이 시작되면, 인도는 핵무기로 중국의 대도시와 공업지대를 타격할 수 있어 승패를 가늠할 수 없다. 그렇기에 두 나라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3488km의 국경을 획정하려고 노력해 왔다. 현재는 명확히 선이 그어지지 않은 실질통제선(LAC)일 뿐이다. 현재 인도 전역엔 ‘반중(反中)’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6월19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이번 충돌로 인도 국민이 상처를 입었고 화가 많이 난 상태”라며 “인도는 평화와 우정을 중시하지만, 주권 수호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모디 총리의 연설 이전에 인도는 중국 접경지역에 육군 병력을 대폭 증원했다. 라다크의 공군기지에는 미그-29 전투기와 공격헬기 아파치를 추가 배치했다. 게다가 러시아로부터 미그-29 21대, 수호이-30MKI 12대 등을 구매하기로 했던 계획에도 박차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인도의 대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월18일 인도 철도부 관계사인 DFCCIL은 중국 업체가 진행하던 47억 루피(약 750억원) 규모의 공사 계약을 파기했다. 6월21일에는 하리아나 주정부가 중국 기업과 맺은 78억 루피(약 1245억원)의 화력발전소 장비 발주 계약을 취소했다. 마하라슈트라 주정부도 500억 루피(약 7970억원) 규모의 중국 기업 투자건에 대한 진행 작업을 보류했다. 게다가 인도 정부 고위 관료들은 중국산 제품의 보이콧을 공공연하게 언급했다. 이에 호응하듯, 민간단체들도 중국산 불매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반중 시위에서는 중국산 상품을 부수고 불태우는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이런 인도의 움직임과 달리 중국은 겉으로는 냉정하게 대응했다. 6월17일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인도에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다만 “두 나라가 국경특별대표회담 등을 통해 사태를 적절히 처리하자”고 밝혔다. 6월23일에는 “인도와 군사 및 외교 채널 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대응은 달랐다. 유혈충돌 직후 분쟁지역에 5000~7000명의 병력과 장갑차, 포병부대를 추가 배치했다. 여기에는 내륙에 주둔하던 제6기계화사단도 포함시켰다. 아크사이친의 경우 평소 500~600명 수준이던 순찰 병력을 1000~1500명으로 늘렸다.
인도 국민들이 6월18일 보팔에서 열린 집회 도중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포스터를 불태우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인도 국민들이 6월18일 보팔에서 열린 집회 도중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포스터를 불태우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은 파키스탄과, 인도는 미국과 밀착

과거 중국은 큰 잠재력을 지닌 인도와의 충돌을 꺼렸다. 중국의 대인도 무역흑자는 지난해 4월부터 올 2월까지 468억 달러(약 56조3518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起) 프로젝트에도 인도와의 협력이 중요했다. 그러나 지난 수년 공안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며 인도를 자극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관계다. 그에 반해 인도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과거 인도는 미국을 멀리하고 서구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 인도·태평양 라인을 추진하며 중국 견제에 나서자, 이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미국산 군사장비를 수입하고 미국과 합동군사훈련을 확대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심지어 미국·일본·호주와의 협력을 ‘4자 동맹’이라 부르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중국은 인도를 향해 ‘4자 동맹’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해 왔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일부 외신은 양국의 갈등이 언제든 국지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