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회장이 말하는 ‘리더의 자질’ “삼성도 ‘칼퇴근’ 한다”
권오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의 비서는 경영학 박사학위 소지자다. 이에 대한 반응은 비슷하다고 한다. “대한민국 1등 기업 CEO(최고경영자)는 박사를 비서로 두는구나” 식이다. 그러면 권 회장은 “우리 비서는 회사를 다니면서 박사학위를 땄다”고 덧붙인다. 의문이 든다. ‘야근을 밥 먹듯’ 시킨다고 알려진 삼성전자에서 회장 비서가 공부를 언제 한 걸까.
“삼성같이 큰 조직에서 ‘칼퇴근’을 할 것이라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보여줄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 비서가 박사 딴 얘기를 했다. 그야말로 내가 야근을 안 시킨다는 근거 아니겠나?”
야근이 노동생산성을 갉아먹는다는 취지의 일화다. 12월18일 오전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21차 서울대 스파크리더스포럼’에서 권 회장이 대담자로 나섰다. 그는 지난 9월6일 펴낸 책 《초격차》에 관해 오종남 서울대 스파크 명예주임교수와 대화를 나눴다. 삼성의 리더십을 다룬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경영도서 판매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권 회장의 대담 내용을 《초격차》에 나온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봤다.
‘사일로 파괴’…
“부서의 책임자를 서로 바꿔라”
첫 번째는 ‘사일로(Silo)’다. 창고를 뜻하는 사일로는 회사 내에선 분리된 사업 부서를 가리킨다. 권 회장은 각 사일로에 속한 직원들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해결 방법은 사일로 간의 폐쇄적인 구조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부서 간 갈등은 감정싸움이 아니다. 각자의 이익을 대변하다 보니 싸움으로 번진 거다. 이에 관해 경영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상대편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라’고. 교수들에겐 미안하지만, 그건 실제로 경영을 안 해 본 사람들의 허황된 말이다. 나는 갈등관계에 있는 두 부서의 책임자를 서로 바꿔버렸다. 그렇게 하니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말을 들으려 하더라. 또 이게 소문이 나니 컨플릭트(conflict·갈등)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삼성전자의 종업원은 약 10만2590명이다. 부서도 그만큼 많이 나뉘어 있다. 그들의 사일로를 파괴하는 전략을 다른 회사가 따라 할 수나 있을까. 권 회장은 그래도 “조직의 규모에 상관없이 발전해 나가는 데엔 보편적인 원리와 원칙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리더라면 사일로 하나에 의존하지 말고 로테이션(rotation·순환배치)하면서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프트 프런트’…
“제일 앞 과정을 바로잡아라”
권오현 회장은 “잘못된 리더는 항상 불필요한 체크리스트만 만든다”고 지적했다. 비유하자면 소 잃어버린 뒤에 외양간을 고칠 전략만 짜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프트 프런트(Shift Front)’가 필요하다고 봤다. 두 번째 키워드다.
“내가 어릴 땐 한강 물을 그냥 퍼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만큼 깨끗했으니까. 지금은 못 먹는다. 처음부터 너무 더럽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먹는 물만 정화할 게 아니라 한강의 상류 지점을 찾아 정화해야 한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문제에 집착해 책임자를 징계하다 보면 다른 직원들은 그게 두려워 형식적인 해결책만 만든다. 그러면 확인해야 할 사안만 늘어나고 문제는 재발하기 마련이다. 제일 앞에 있는 과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프런트를 시프트(shift·바꾸다)하자는 거다.”
권 회장은 책을 통해 부연설명을 했다. 예를 들어 품질 부서는 보통 제품이 개발된 뒤에나 관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들 부서는 “뒤처리만 맡는다”고 호소하게 된다. 해결책은 제품을 개발 단계 때부터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권 회장은 “품질 부서가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 부서에 지속적으로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품질 부서가 일종의 주도권도 가져올 수 있다.
‘실패’…
“실패에도 종류가 있다”
마지막 키워드는 ‘실패’다. 권 회장 앞에 습관처럼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반도체의 신화’ ‘샐러리맨의 전설’ ‘연봉킹’ 등이다. 서울대·스탠퍼드대를 나온 그는 2017년 연봉으로 243억원을 받았다. 국내 CEO 중 최고 액수다. 실패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권 회장은 그러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나도 실패를 했다”고 말했다. 대신 “실패에도 종류가 있다”고 덧붙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인 건 절대 아니다. 여기엔 주석을 좀 달아야 한다. 상사가 시킨 일을 실패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본인 생각이 전혀 발현되지 않는 실패라서다. 쓸데없는 실패고, 남는 건 ‘개떡 같은 상사’란 비아냥뿐이다. 반대로 본인이 직접 계획하고 주도한 일을 실패했을 때 비로소 성공으로 가는 실패가 된다.”
군대 가서 극복하지 못한 육체적 한계, 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겪었던 문화 부적응, 대학 입시에서의 낙방. 모두 권 회장이 지적한 잘못된 실패다. 자신이 원해서 맞닥뜨린 게 아니라 그저 주어진 환경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권 회장은 “명문대 나온 친구들이 의외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엄마의 강요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해선 사회의 강요로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 한다는 것. 권 회장은 “항상 옳다고 생각한 길만 걸어왔기에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스스로 길을 개척하다 실패해도 다독여주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