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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개 속 소녀》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

이탈리아 스릴러 《안개 속 소녀》는 세 인물을 꼭짓점 삼아 이야기를 펼친다. 소녀 실종 사건 수사의 전권을 쥐고 있는 보겔 형사(토니 세르빌로), 보겔에 의해 용의자로 몰린 남자 마티니(아레시오 보니) 그리고 보겔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정신과 의사 플로레스(장 르노). 보겔과 마티니가 엮인 수사 과정이 과거 상황이고, 플로레스와 보겔의 이야기는 현재 상황이다. 이 액자식 구성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는 효과를 낸다.

이것만 장점인 영화는 아니다. 기존 스릴러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기는 영리함을 갖췄다. 그러나 점차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는 듯한 이 영화가 종국에 우리에게 묻는 건 뜻밖에도 ‘진실이란 무엇인가’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진실이 정말 중요한가’일 것이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어느 밤. 정신과 의사 플로레스가 누군가를 상담하기 위해 급히 집을 나선다. 그는 40년간 아베쇼라는 마을의 정신과 전문의로 일해 왔고, 두 달 후 은퇴를 앞둔 베테랑이다. 경찰은 플로레스에게 환자가 사고를 당했으며 그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정보를 준다. 상담실에 들어선 플로레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도맡는 사건마다 언론에서도 유명세를 치르는 보겔 형사다. 그는 최근까지 언론을 떠들썩하게 하는 소녀 실종 사건을 주도해 온 인물이다. 그는 어떻게 플로레스의 상담실에 오게 됐는가. 옷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플로레스는 상담을 통해 전말에 접근하려 한다.

본격적 사건은 12월23일 오후, 교회에 가겠다며 집을 나선 소녀 안나(예카테리나 부세미)의 실종에서 시작한다. 곧 보겔 형사가 이끄는 수사팀이 꾸려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안나의 생사 확인과 범인의 정체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 언론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보겔 형사의 목적은 조금 다른 데 있다. 그는 과거 테러 사건 용의자로 엉뚱한 사람을 지목했다가 체면이 구겨진 적이 있다. 범인으로 몰렸던 무고한 남자는 후에 거액의 보상을 받으며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다. 보겔은 안나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며 명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또다시 그가 이용하는 것은 언론.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보겔의 수사는 차라리 하나의 거대한 쇼처럼 보일 지경이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 영화사 마그나


수사는 하나의 거대한 쇼인가

따라서 수사가 진행될수록 안나의 존재는 그를 집어삼킨 안개 속으로 자꾸만 밀려난다. 경찰과 언론은 범인을 지목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먼저 찾아내는 자가 이 파워 게임의 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수사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보겔은 지난번 담당 사건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검증되지 않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한 명의 희생자를 내세우려 한다.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마티니 교수다. 그때부터 영화의 초점은 오직 마티니에게 맞춰진다. 안나의 생사는 더더욱 관심 밖의 문제가 된다. 그는 왜 안나를 노렸는지, 안나를 어떤 과정으로 납치했는지를 밝히는 게 더욱 중요해진다. 마티니와 가족들은 억울함을 주장하지만, 그가 진짜 범인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첫 번째 의도가 드러난다. 영화는 우리에게 진실이 정말 궁금하냐고 묻는다. 마티니의 존재가 등장함에 따라 관객 역시 보겔의 수사 흐름에 똑같이 동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따라서 관객의 관심은, 범죄의 피해자인 안나의 상황보다 범죄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밝혀내는 자극적인 부분에 더욱 쏠린다. 이 아이러니한 호기심은 실제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대중에게 똑같이 일어난다. 영화는 바로 이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형사의 조사를 받기 전 마티니 교수는 문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의 힘은 악한 것에 있다. 희생양을 찾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결백하고, 회피 경향이 있는 사람으로. 모두가 그를 의심해야 한다. 책에서는 증오로 사람을 죽이지만, 현실에서 동기는 보통 돈이다.” 이 장면과 대사에 담긴 함의는 무척 중요하다.

카메라는 종종 사건의 배경이 되는 아베쇼 마을의 전경을 비추는데, 자세히 보면 이것은 마을 그대로의 모습을 꾸며놓은 모형을 촬영한 것이다. 이 장면이 주는 효과는 분명하다. 감독은 이것이 현실이 아니며, 연출자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이야기 속 세상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책에서는 증오로 사람을 죽인다”던 마티니 교수의 말을 은연중에 반복해서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허구의 세계가 분명하므로, 마티니가 안나에게 어떤 증오를 품고 접근했는지를 무의식중에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영화사 마그나


영화 밖 현실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놀라운 반전을 숨기고 있는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 그 모형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은 영화가 끝난 뒤 모형이 아닌 ‘진짜 세계’를 살아야 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당신이 믿는 것이 진실인지,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것을 믿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깔끔한 완결이라는 게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2012)는 진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의 마녀사냥에 의해 낙인이 찍혀버린 남자의 분투를 다룬다. 잔혹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사건일수록 ‘공동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서둘러 단죄의 대상을 정하려 하는 공동체의 이기적 이면을 들추는 작품이다. 《안개 속 소녀》 역시 어떤 면에서는 이와 궤를 나란히 한다. 보통 스릴러에 적용되는 덕목이란 긴장감 있는 사건 해결 과정인데, 어떤 작품들은 사건의 이면을 통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극 중에서 보겔이 새로운 수사 국면을 맞이하는 때는, 30년 전 미제 사건으로 남았던 연쇄 살인 사건과 안나의 실종을 연결하려는 한 기자를 만났을 때다. 하지만 그 사람마저도 진실을 추구한다기보다, 이것을 통해 30년간 구겨졌던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더 강해 보인다. 진실은 개인의 이익과 연관됐을 때만 중요해지는 것이다.

《안개 속 소녀》는 원작 소설을 쓴 도나토 카리시가 직접 메가폰을 잡고 연출한 작품이다. 애초 영화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로 쓴 작품이었으나, 이를 먼저 소설로 출간하고 이후 영화까지 만들게 됐다. 원작자가 영화의 연출자로 나서는 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작품의 세계를 그 누구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강점이다. 실제로 행동과학 범죄학자 출신이라는 이력이 작품 곳곳에서 날카롭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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