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위안부 등 이유로 한류 거부 잇달아…팬덤 영향 못 미치는 ‘영양가 없는’ 혐한 배경은
정부의 화해치유재단 해산 선언과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판결 이후, 한·일 관계는 전방위적으로 흔들리는 모양새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연일 강경 발언을 내놓는 가운데, 한·일 관계 악화의 여파는 정치와 외교 영역을 넘어, 문화 부문까지 확대됐다. 일명 ‘한류 보이콧’. 발단은 지난 10월 일본 보수언론인 도쿄스포츠가 방탄소년단(BTS) 멤버인 지민이 입은 ‘광복 티셔츠’를 문제 삼으면서였다.
지민이 지난해 월드투어를 하면서 입었던 티셔츠에 ‘우리의 역사’ ‘애국심’ ‘해방’ ‘한국’ 등의 문구와 원폭이 투하된 그림이 함께 새겨져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TV아사히와 NHK 프로그램 등 예정됐던 방탄소년단의 일본 방송 출연이 취소됐다. 일본 보수언론은 지민의 티셔츠가 ‘원폭 티셔츠’라며 방탄소년단을 몰아붙였다. 멤버들이 수년 전 광복절에 올렸던 독립투사들에 대한 글까지 끄집어내면서 혐한(嫌韓) 정서에 불을 붙였다. 한동안 뜸했던 혐한 시위가 도쿄 도심에서 열리기도 했다.
일본 우익이 비판을 가하고 방송사가 출연을 취소시키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중들에게 미치는 방탄소년단의 위력은 대단했다.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의 시위가 열렸고, ‘반일’ 프레임을 씌운 보도 일주일 뒤 발표된 오리콘(일본 음악 차트) 주간 싱글차트에서 방탄소년단은 1위를 차지했다. 11월13~14일 열린 방탄소년단 도쿄돔 콘서트 좌석은 모두 매진되며 성황을 이뤘다. 방탄소년단 소속사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도 논란을 피하지 않았다. 공연 첫날인 11월13일 “전쟁, 원폭, 나치를 포함한 모든 극단적 정치적 성향의 단체 및 조직을 반대한다.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드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의도치 않게 상처를 드렸다면 사과드린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한·일 과거사에 기반한 한류 거부 현상
한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음악 차트 상위권을 석권하고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논란에도 저물지 않는 방탄소년단의 인기와, 지민이 입었던 티셔츠가 ‘원폭 티셔츠’가 아닌 ‘광복 티셔츠’라며 한·일 관계의 특수성을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린 ‘아미’라는 강력한 팬덤이 있었다. 한편으로 이 현상은 일본 방송 출연이나 언론보도가 한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예전에 비해 대단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정덕현 문화 평론가는 “일본 우익 매체들이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일본 최고 권위의 연말 가요 축제) 등의 방송 출연을 중요한 지표처럼 얘기하지만, 글로벌 네트워크가 통용되는 현 시대에는 과거만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평했다.
일본 극우는 최근 K팝 걸그룹 트와이스에게도 반일 프레임을 씌웠다. 트와이스 멤버 다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돕는 사회적 기업인 ‘마리몬드(Marymond)’의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에서다. 트와이스는 최근 K팝 걸그룹 최초로 2년 연속 NHK 홍백가합전 출연을 확정했다. 일본 훗카이도의회 의원이자 자민당 소속 극우 정치인인 오노데라 마사루(小野寺秀)는 11월13일 자신의 SNS에 “트와이스 멤버 다현이 ‘위안부 여성 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티셔츠 매출은 부적절하게 벌어지고 있는 한국 위안부 활동 지원금으로 쓰인다. NHK는 이런 반일 활동가를 홍백가합전에 출전시킬 것인가”라고 말했다. 어떤 영향이 있었을까. 트와이스의 일본 내 인기는 여전히 뜨거우며, 내년 3월부터는 K팝 걸그룹 최초로 일본 돔 투어가 예정돼 있다.
그러나 이렇듯 ‘영양가 없이’ 우익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한류 보이콧 현상이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배경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을 비롯한 최근 사안들이 한·일 간 냉기류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사례를 살펴보면 일본의 한류 보이콧 현상은 모두 한국과 관련된 과거사에 기반해 일어났다. 독도와 위안부, 강제징용 판결 등 일본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거나 지우고 싶어 하는 역사들이다. 한국 연예인들이 이와 관련한 역사를 알리는 행동을 보일 경우, 그가 속한 한류 문화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독도 관련 행사 참여 이유로 ‘한류 보이콧’
김태희는 2011년 일본 후지TV 드라마 《나와 스타의 99일》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당시 일본에서는 항의 시위가 열렸다. 김태희가 2005년 스위스 홍보대사로 활동할 당시 ‘독도사랑 캠페인’에 참여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던 전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일본 극우는 “김태희는 반일 발언을 해명하라” “반일 여배우를 지원하는 일본 기업은 우리가 기억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 움직임에도 드라마의 첫 시청률은 10.2%를 찍었다. 이후 반한파들은 김태희를 모델로 내세운 기업들을 공격했다. 김태희를 모델로 기용한 제약회사의 기초화장품 CF 발표회가 취소되는 일도 벌어졌다. 반한 감정을 지닌 네티즌들의 글이 홈페이지에 계속 올라오자, 발표회 현장에서 만일의 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한 일본 우익단체 전직 간부는 이 제약회사를 협박하다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한창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당시인 2012년에는 독도 관련 행사에 참여했던 배우 송일국이 출연한 한국 드라마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일본 방영이 연기됐다. 당시 드라마를 방영하기로 했던 일본 위성방송 BS닛폰 관계자는 “우리는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 횡단 수영에 송일국씨가 참여한 것을 확인했다”며 “그가 출연한 드라마 대신 다른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야마구치 쓰요시(山口壯) 일본 외무성 차관은 “독도 수영 행사에 참가한 송일국은 앞으로 일본에 오기 힘들 것이다. 그것이 일본의 국민감정”이라고 공공연하게 발언하기도 했다. 방송사의 보이콧을 넘어 일본 정부 부처 차관이 이 같은 언급을 했다는 데서, 한국과 일본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보복성 발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당사자인 송일국씨는 자신의 SNS에 “그냥 제 아들 이름이나 불러봅니다. 대한 민국 만세(송일국의 세쌍둥이 아들의 이름은 ‘대한’ ‘민국’ ‘만세’다)”라며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2014년에는 가수 이승철이 일본에서 입국 거부를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2013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승철은 독도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의 노래 《그날에》를 불렀는데, 이에 대한 표적성 입국 거부라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일본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최근 언론에 나온 것 때문”이라고 말을 했다가 “20년 전 이승철의 대마초 사건 때문”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대마초 사건 이후에도 이승철은 15차례나 일본을 다녀왔고, 2000년도 초반에는 일본에서 콘서트를 여는 등 어떤 활동도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승철은 “표적과 보복성 입국 거부로 받아들인다. 이번 기회에 여러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한다”며 “내 나라, 내 땅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문제 삼았다면 굴복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문화 보이콧 현상이 한류에만 국한돼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번에 방탄소년단 지민의 ‘광복절 티셔츠’를 ‘원폭 티셔츠’라 일컬으며 반일 프레임을 씌웠던 일본 언론은 2010년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론 위즐리’ 역을 맡았던 영국 배우 루퍼트 그린트가 일본을 방문하면서 원폭 투하 사진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실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2000년 미국 래퍼인 에미넴이 발표한 ‘리멤버 미(Remember me)’, 2006년 블랙아이드피스가 발표한 ‘라이크 댓(like That)’이라는 곡에서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비유됐지만 문제가 제기되거나 공연활동에 지장을 받은 사례는 없었다.
“적을 만들어 단합하기 위한 日 극우의 행태”
그렇다면 일본 극우는 수십 년 동안 왜 ‘한류 보이콧’만을 이어오는가. 물론 한류의 흐름이 그만큼 빨라 반작용이 생기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 엔터테인트먼트 대표는 과거 반(反)한류 기류에 대해 “빠르게 유입되는 다른 문화에 대한 반작용은 당연한 사회현상”이라며 “기류에 집중하기보다 더 좋은 콘텐츠를 통해 좋은 문화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특히 일본이 한류 보이콧 움직임을 보이는 배경을 한·일 관계의 특수성과 일본의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찾았다. 정덕현 문화 평론가는 “한류에 대한 반작용이 근대 시절의 청산되지 않은 잘못된 역사 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저항들이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한·일 문화 인적교류 TF 위원장인 이훈 한양대 교수는 “이런 현상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특수 관계에 기반한 것”이라며 “일본 극우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펼치는 방법은 미워할 수 있는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한국으로 설정해 (문화를 거부하는) 현상이 강해지는 형태를 보이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일 관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의 대응을 ‘감정적인 조치’라고 봤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 정부는 독도 관련 활동을 해 온 연예인에게 직접 나서서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며 “일본은 상당히 감정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독도 문제에 대한 보복조치 언급은 이상한 발상이다. 일본의 나쁜 부분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우리 정부는 일본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차원을 통해 지적해야 한다. 우리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법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