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발포 명령 거부 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여전히 대물림되는 고통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7년이 됐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그날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왜 쏘았지?” “왜 죽였지?” “얼마나 죽였지?” 우리는 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지 못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 움직임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5·18 당시 전남 지역의 치안총책은 고(故) 안병하 경무관(전남 경찰국장)이었다. 그는 5·18 광주의 숨은 영웅으로 불린다.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는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해 수많은 광주 시민들을 살렸다. 이것으로 인해 안 경무관과 그의 가족은 끝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정작 ‘안병하’는 철저하게 소외됐다. 당시 전남 지역의 치안총책이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더욱이 유족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고인의 명예 회복과 정부와의 소송 등으로 끝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부인 전임순 여사는 “지난 세월이 너무 고통스러웠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언제나 시민들 안전에 최우선
안병하 경무관은 육사 8기로 군에 입문했다. 동기생으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있다. 6사단(청성부대) 포병관측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화랑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다.
1962년 총경으로 특채돼 경찰에 투신했다. 경찰 입문 9년 만인 1971년에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그 뒤 치안국 소방과장, 방위과장을 거쳐 지금의 지방경찰청장인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을 거쳐 1979년 2월20일 전남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는 정국이 급변하며 불안하던 시기였다. 안 경무관이 전남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은 지 8개월 뒤에 10·26 사태가 터진다.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은 12·12를 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휘어잡았다.
1980년 4월로 넘어가자 광주 지역 대학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남대는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을 벌였고, 조선대에서는 비리사학 퇴출을 명분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안 경무관은 대학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막는 기동대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시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안 경무관은 언제나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뒀다.
5월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를 선포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대학 휴교령과 국회 해산, 정치인 예비검속 등이 이어졌다. 광주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시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과격 진압할 것이라는 소문도 들리면서 광주시내는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5월18일 광주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됐고 전남대 등 주요 대학을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교내에 남아 있던 대학생들을 무조건 체포했다.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짓밟으며 해산시켰다. 시위대를 대하는 경찰의 방식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찰은 시위대의 과격한 행동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안 경무관은 늘 참모들에게 “시위대와 대치할 때는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평화적인 시위가 되도록 슬기롭게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총기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시위대에 시민들이 가세하자 신군부는 안 경무관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안 경무관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로써 많은 광주 시민들의 목숨을 살렸고 경찰의 명예를 지켰다.
이후 안 경무관은 ‘직무유기 및 지휘포기 혐의’로 직위해제 당한 후 보안사에 끌려가 8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로, 치안감 승진 대상 1순위였지만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면서 운명이 엇갈렸다. 신군부는 처음에는 ‘부정축재 비리자’로 엮으려고 했으나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없었다는 후문이다. 안 경무관은 강압에 의해 사표를 제출한 뒤 석방된다.
발포 명령 거부 뒤 8일간 잔혹한 고문
집에 돌아온 안 경무관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정신적인 충격 때문인지 말문도 닫아버렸다. 고문을 당한 후에는 단지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전임순 여사는 “남편은 평소에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건강한 체력을 자랑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정신적 충격과 고문 후유증으로 담낭염, 고혈압, 당뇨, 신부전증까지 앓았다. 하루건너 피를 걸러내야 하는 중병에 시달렸다. 미국 LA까지 가서 신병 치료를 했으나 진전이 없자 4개월 만에 귀국하기도 했다. 결국 1988년 10월10일 서울의 한 내과의원에서 혈액투석을 받다가 숨졌다. 계엄사에서 풀려난 후 사망하기까지 8년 동안 병원을 전전한 것이다.
가장인 안 경무관의 죽음은 유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막대한 병원비로 강제해직 후 받은 퇴직금이 모두 들어갔다. 그가 사망한 뒤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유족들은 안 경무관이 생전에 살던 집도 눈물을 머금고 팔아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지만 어느 곳,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순직 후에도 국립묘지에 들어가지 못해 충북 충주시 양성면 소재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막내아들 호재씨는 “유족들이 아버님의 명예회복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닐 때 어느 기관 한 군데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건 치안본부(경찰청의 전신)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전임순 여사와 세 아들은 1994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광주보상법’에 의해 보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8일간 고문받은 것만 ‘불법 구금’으로 인정돼 800만원만 받았다.
유족들은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3년 후 대법원은 “광주보상법에 따라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생계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된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생활지원금과 위로금으로 9100만원의 보상금,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확정했다.
이로써 유족은 불법구금 인정 보상금 800만원과 광주보상금 9100만원 등 총 1억1000만원 정도를 수령했다. 안 경무관이 광주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수령하기는 했으나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유족들의 끝없는 노력으로 안 경무관은 2005년 9월 국가유공자법에 따라 순직 군경으로 인정돼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전임순 여사는 2009년 3월 보훈급여를 신청했는데, 보훈처는 조건부 지급을 통보했다. 이전에 수령한 5·18 보상금을 반환해야만 보훈급여를 지급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유족들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10년 8월 “보훈급여금을 지급하면서 종전 보상금 반환 조건을 내걸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 여사는 2005년 9월부터 2010년 8월까지의 소급 보훈급여금(순직 고령배우자) 약 6000만원을 수령했고, 2010년 9월부터 매월 191만원씩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23년 동안 길고 긴 소송
감사원은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가 안 경무관 부인에게 지급한 5·18 보상금이 이중 보상이라고 지적했고, 이에 따라 보상심의위는 2010년 12월 종전에 지급한 보상금 환수 통지 처분을 내렸다. 유족들은 이에 맞섰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를 상대로 5·18 보상금 반환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재판은 엎치락뒤치락했다. 1심에서는 패소했으나 항소심인 2심에서는 승소했다.
재판부는 보훈급여는 장래에도 원고(미망인)에게만 매달 지급될 것이고, 나머지 선정자(아들 3명)에게는 전혀 지급되지 않는 점, 미망인이 사망하더라도 아들들이 보훈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이중 보상이 아니라고 판시한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광주고법은 “5·18 보상금을 유족들이 지분을 나눠서 정부에 반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안 경무관의 유족들은 다시 보상심의위원회를 대상으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즉 미망인만 2005년부터 유족연금 혜택을 받고 있으니 나머지 세 아들에게는 반환을 면제해 달라는 소송이다. 유족들은 1994년부터 23년 동안 길고 긴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는 5·18 보상금 반환처분 취소해야”
故 안병하 경무관 아들 안호재씨 인터뷰
유족들이 억울하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1997년 광주시에서 받은 보상금 약 1억원은 ‘생활보상금 차원’의 돈이었다. 8년 동안의 투병비, 간병비, 병원비 등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금액이다. 여기에다 강제해직된 뒤의 예상 수입금(월급 등)이 빠져 있다. 미망인 유족연금을 받은 시기도 고인의 사후 17년 만인 2005년부터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고인이 사망한 1988년부터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유족들에게만 잘못을 떠넘기고 있다.
5·18 보상금 반환처분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반환처분은 당연히 취소돼야 한다. 이제 지난 30여 년간 이어져온 소송을 끝내고 싶다. 그래야 고인이 하늘에서 가족 걱정 없이 평온하게 영면할 수 있다. 정부가 이걸 도와야 한다.
최근 온라인 청원과 탄원서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3월9일부터 다음 아고라 청원을 시작했다. 별도로 탄원서 연명부를 만들어 자필 서명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까지 서명운동에 동참하겠다며 연락이 오고 있다.
고통 대물림에 유족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지난 세월 동안 고통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큰형은 한국이 싫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지금까지도 고통은 여전하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살린 영웅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지 국가에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