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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됐다’ ‘부풀려졌다’ ‘모르는 일이다’… 반성 외면하는 일본 우익들의 거짓말
1937년 12월13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중국의 수도 난징에 쳐들어갔다. 성곽의 중화문(中華門)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진입했다. 중국군이 곳곳에서 저항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일본군에게 무력하게 짓밟혔다. 뒤이어 일본군은 ‘인간 청소’에 나섰다. 항복한 중국군 포로들과 민가에서 색출한 젊은 남자들을 성 밖 양쯔강(揚子江)이나 무푸산(幕府山)으로 끌고 갔다. 일본군은 그들을 일렬종대 혹은 일렬횡대로 세운 뒤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기관총을 난사한 뒤 숨 쉬는 생존자를 확인사살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때로는 먼저 일본도로 목을 베어 죽였다. 심지어 포로와 민간인으로 하여금 땅을 파게 한 뒤 산 채로 파묻은 일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을 따라 종군한 오마타 유키오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은 앞줄 포로들의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지고 자신들의 목이 잘렸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됐지만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타! 타! 타! 포로들은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없었다.”
피해자만 30만으로 추정…일본은 ‘모르쇠’
남자들에 대한 청소를 끝마치자, 일본군은 여자들을 강간하기 시작했다. 강간 방식은 아주 참혹했다.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ㆍ먼저 강간하고 죽여버림)’ ‘시신훼손’ 등이었다. 대상은 10살이 안 된 어린이부터 70대 노파까지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수녀·비구니 등 눈에 보이는 대로 난징의 여성을 능욕했다. 임신부도 강간했는데, 강간 뒤 여성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일본군 병사인 아즈마 시로는 “우리는 중국 여자들을 옷 벗겨 구경한 뒤 ‘오늘은 목욕하는 날이다’라 외치며 윤간했다. 강간한 뒤 그들을 죽여버렸다. 시체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라고 회고했다.
난징이 점령된 지 수일 만에 시내 곳곳에는 ‘사지’가 절단되거나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쌓였다. 일본군은 살해한 여성의 성기를 도리거나 그 위에 막대기를 쑤셔놓았다. 이처럼 살육과 강간은 6주간 계속됐다. 학살의 광란 속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죽었는지 파악하기란 힘들었다. 징성훙(經盛鴻) 난징사범대학 교수는 필자에게 “1948년 도쿄 전범재판은 일본군이 난징에서 20만명 이상의 인명을 학살했다고 판결했다”며 “판결문에는 양쯔강에 버려진 시체를 포함하지 않았는데 일본 전범들은 그 수가 10만 명 이상이라고 자백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까지 30만의 학살 피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난징대학살 자체를 아예 부정한다. 그 선두에 극우 학자와 예술가가 있다.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아세아대학 교수는 1998년에 낸 《난징학살의 철저검증》에서 “난징에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책에 ‘일가족 9명 중 7명이 살해당한 샤수친(夏淑琴)의 사례는 날조됐다’고 적시했다. 이에 샤씨는 하가시나카노와 책을 낸 출판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2009년 2월 도쿄 고등법원은 히가시나카노의 책 내용이 샤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400만 엔의 배상판결을 확정했다.
미즈시마 사토루 감독은 《난징의 진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미즈시마는 “난징대학살의 증거로 나온 자료는 모두 중국 측의 선전자료”라면서 “일본인은 저렇게 시체에 악랄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일본 각계에서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데는 일본 정치인들이 배후에서 선동했기 때문이다. 2007년 2월 자민당 내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은 소위원회를 만들어 “(난징대학살에 대한)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 모임은 1997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주도해 결성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이런 시각은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정부가 난징대학살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자, 일본 외무성은 히가시나카노의 저서를 인용해 부정했다.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 메이세이대학 교수가 작성한 외무성의 의견서는 《난징학살의 철저검증》에서 지적한 왜곡된 사례를 그대로 담았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에도 지난해 10월 난징대학살 자료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지난 6월부터 세계기록유산의 일본어 명칭을 ‘세계의 기억’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사실 난징대학살은 전쟁 중 갑자기 일어난 탈선행위가 아니다. 난징 공격 전 일본군 지휘부는 각 부대에 ‘모든 포로들을 처형한다’ ‘처형방법은 포로들을 12명씩 나눠 총살한다’고 지시했다. 일본 육군 제6사단도 ‘여성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중국인이면 모두 살해하고 집은 불사른다’는 명령서를 받았다. 일본군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의 방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군 지휘부는 큰 피해를 입고 전투에 지친 병사들에게 위안거리를 주려고 했다. 또한 중국인의 저항 의지를 무너뜨릴 본보기가 필요했었다. 바로 그 대상이 중국 수도였던 난징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기 전 치밀한 학살계획을 수립했다. 일본군은 군사작전을 치르듯 난징 13곳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에서 “죽은 사람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222km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톤에 달한다”면서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난징의 강간》은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과 피해자들이 겪은 참상을 서구 사회에 처음 알린 역작이다. 중국조차 침묵했던 난징대학살을 미국의 중국계 언론인이 생생히 복원해 내어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 학살 진상 담은 도서 출간 막아
그러나 《난징의 강간》은 정작 진상을 알아야 할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1999년 일본 출판사 가시와쇼보(柏書房)가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우익세력은 출판사에 몰려와 협박했다. 수일 동안 선전차로 고성방가를 일삼았고, 전화ㆍ편지ㆍ팩스 등으로 압력을 넣었다. 이에 출판사는 적지 않은 내용과 표현을 수정해 책을 출판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 장은 반대했고, 결국 책은 출판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일본 우익세력은 《난징의 강간》을 반일위서(反日僞書)라 규정짓고 대규모 규탄집회를 개최했다. 난징대학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아이리스 장을 ‘역사를 조작하는 마녀’로 비난했다.
심지어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난징대학살의 희생자 수를 문제 삼아 본질을 흐렸다. 양심 있는 학자들조차 난징대학살을 인정하면서도 피해 규모와 학살자 수 등에는 중국 학자들과 첨예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어느 독자는 ‘왜 우리가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알아야 하나’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한데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와 우익세력이 난징대학살과 군위안부 문제를 함께 묶어 부정하고 공격하는 현실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오늘 우리가 난징대학살을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