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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여는 새 천년 첫 입학식

정작 주인공은 젊은 부모들인지 모른다.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왼쪽 가슴에 이름표를 달며 자랑스러워하지만, 웬일인지 다른 아이들보다 작아 보이는 제 아이의 어깨를 바라보는 젊은 부모들은 속내가 착잡하다.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큰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이제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 속으로 첫발을 들여 놓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는 가슴 한켠이 짜안한(안쓰러운)것이다.   아이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때, 함께 부동 자세를 취한 젊은 부모들은 20~30년 전, 그 쌀쌀했던 봄날로 달려가 있다. 그날, 무슨 옷을 입었던가, 부모님과 선생님은 무슨 말을 했던가. 한 세대 전, 어린 자식의 가슴에 손수건을 매달던 부모들의 심사는 어떤 것이었을까.형제가 많았던 그 시절, 부모들은 아마 무심했으리라, 요즘에야 당장 무능력으로 치부되지만, 무심함은 고단한 시절을 견뎌내게 해준 어떤 힘이었다.   젊은 부모들은 이열 종대 속에 서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서른 혹은 마GMS에 다가가는 젊은 부모들은 새삼 자기 나이를 확인한다.  돌아보니, 매번 희망에 속으며, 스스로를 배반하며 여기, 이 나이까지 달려 왔구나, 라고 한숨을 내쉰다.   ‘품 안에 자식’을 세상 속으로 띄워보내는 봄날은 쌀쌀하기만 하다.  세상을 이끌어가겠다는 정치권은 진흙탕이고, 시민의 목소리는 아직도 농성 중이다.  1등만이 살아 남는 다는 자본주의는 무서운 속도로 카지노판을 닮아간다. 인터넷이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다고 하지만, 종교와 민족 사이, 부와 빈의 경계 위에서는 끊임없이 스파크가 일어난다.

  저 아이들이 두어 번의 입학시과 졸업식을 거쳐 ‘진짜 세상’으로 진입하는 날은 멀지 않다. 아주 가까운 미래, 2010년대의 초입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수년, 저 아이들이 젊은 부모가 되었을 때, 그들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예닐곱 살짜리의 뒷모습을 보며 어떤 과거와 미래를 떠올릴 것인다, 그때에도 봄날이 이렇게 사납기만 할 것인가.
李文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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