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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싸움에 여권에 대한 불만 겹쳐 ‘초강수’…김은성·신 건 악연이 사건 키워

 
“해도 너무 한다. 오랜 관행으로 내려온 업무였는데 정보기관장 두사람을 한꺼번에 집어넣는 것은 국제적으로 국가 망신거리 아닌가”.
11월15일 검찰 도청수사팀이 김대중 정부 임기 후반에 수장을 맡았던 임동원·신 건 전 국정원장을 불법 도청 지시 혐의로 전격 구속하자 한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해 검찰이 국정원의 힘을 빼려고 작심하고 달려든 것 같다고 해석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검찰 수사팀 일각에서도 ‘이번에는 국정원을 손 좀 보려 했다’는 의지를 굳이 감추지 않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청사에서 만난 도청수사팀 관계자는 “우리는 그동안 국정원에 철저히 속았다. 솔직히 이번에 수사한 정도의 혐의로 우리가 DJ 정권의 불법 도청 전모를 파헤쳤다고 말할 자신도 없다”라고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 소환한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이 보여준 고자세와 비협조에 잔뜩 독이 올랐다는 것이다. 도·감청 실무 부서에 근무했던 국정원 직원들은 김승규 국정원장으로부터 ‘처벌하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수사에 협조하라’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 검찰 소환에 응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정보기관원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버티기에 나섰다. 심지어 어떤 직원은 끝까지 소환에 불응하며 검찰 수사관더러 국정원에 찾아와 조사하라고 하기까지 했다. 

 수사 과정에서 나타난 양측 직원들의 이런 자존심 대립은 공안기관끼리의 힘겨루기 양상으로까지 번졌다. 약이 오른 검찰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국가 최고 공안기관이 검찰이라는 점을 국정원 직원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공감대마저 싹텄다고 한다. 

검찰로서는 도·감청 수사에 대한 국정원과의 옛 악연도 부담이었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검 공안부는 국정원 도청 고발 사건을 2년여 수사한 끝에 무혐의 처리해 주었다. 당시 검찰은 휴대전화 도청은 불가능하고, 대선 직전 한나라당이 폭로한 도청 문건은 국정원 도청 문건이 아니라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불과 석 달 만에 미림팀 도청 테이프 유출 사건이 불거지자, 국정원은 휴대전화 도청이 가능하고, 김대중 정부까지 도청을 했다는 내용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해 사실상 검찰에 망신을 준 격이 되었다. 결국 이번 도청수사팀은 당시 무혐의 처리한 한나라당 폭로 문건이 사실은 국정원 도청 문건이 맞다고 뒤집어 발표해야 했다.

검찰, 국정원 직원들의 고자세에 독기 품어

 국정원을 압수 수색해 도청 대상자 1천8백여명의 명단을 확보한 검찰이 여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임동원·신 건 전 국정원장 구속이라는 강수를 둔 배경에는 정치권에 대한 불만 기류도 작용했다. 지난 달 법무부장관의 강정구 교수 불구속 지휘권 발동과 이에 맞선 검찰총장의 사표 제출 파동으로 검찰 조직은 상당한 상처를 입은 터였다. 이를 만회해야 한다는 심리와 여권에 대한 반발심이 겹쳐 ‘비타협적인’ 초강수를 부르는 데 한몫 했던 셈이다.

 
그동안 자기 재임 기간에 불법 도청을 근절하고 도청 장비도 폐기시켰다고 주장해온 신 건씨를 검찰이 전격 구속한 점은 김승규 국정원장이 가장 난처해 하는 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모두 검찰 출신 국정원장으로서, 지난 6월 김승규 국정원장이 부임하기 전 신건 전 원장을 찾아가 원장 직을 맡을지 상담했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동안 직원들에게 적극적인 수사 협조를 독려하며 정상 참작을 얻어낼 요량이었던 김승규 원장은 검찰이 신 건씨마저도 구속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검찰이 신씨를 구속하는 데는 김은성 전 차장의 협조가 크게 작용했다.

DJ 정부 시절 국정원 내 권력 실세로 호가호위했던 김은성 전 차장이 DJ에게 누가 될 것을 알면서도 모시던 수장들의 불법 도청 연루 혐의를 검찰에 적극 진술한 데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여기에는 김은성씨와 신 건씨의 오랜 원한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DJ 정권 말기에 진승현 게이트로 김은성씨가 구속될 때 김씨는 이를 신 건 원장의 작품으로 여기고 있었다. 구속 직전 김은성씨를 만난 여권의 한 변호사는 “김은성씨는 지금도 신 건씨에게 엄청난 적개심과 원한을 품고 있다. 하루에도 신경안정제를 6~10알씩 먹어야 움직일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어떤 면에서는 신 건과 김은성의 악연이 이번 수사를 키운 측면도 있었던 셈이다.

“임동원·신 건 구속 청와대에 미리 귀띔”

검찰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해 수사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과정에서 우리 현행법에는 금지되어 있는 플리바게이닝(범죄혐의를 털어놓는 대가로 선처해주는 제도)을 사실상 제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 건 원장 이전에 발생한 DJ 정권의 국정원 불법 도청 사실을 털어놓은 김병두·이수일 전 차장이 불구속 기소되었다는 점도 플리바게이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은 구속 영장을 통해 신 건 전 원장이 직접 도청을 지시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보고서를 읽어보고 알고는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기소했다. 그러나 신 건씨는 수감되는 순간까지 자기는 불법 도청을 지시한 일도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난지도 몰랐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재판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자 청와대는 ‘너무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청와대의 이런 표현은 DJ의 반발을 의식한 제스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검찰 수뇌부가 회동해 두사람에 대한 구속 방침을 정한 뒤 청와대에는 사전에 귀띔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종빈 총장 사퇴 이후 현재 검찰은 정상명 총장 내정자와 안대희 서울고검장을 중심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사시 동기인 17기 출신 4명이 모여서 중요 사안을 협의하는 집단지도체제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때문에 여권 내에서는 노대통령이 지난 7월 말부터 도청 수사에 대해 보여온 원칙적이고 강경한 정면 돌파 의지가 검찰 수뇌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재·보선 패배 이후 열린우리당 의원 가운데 80% 정도가 민주당과의 통합에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상황이어서 노대통령의 원칙론적 접근에 대한 이들의 불만도 적지 않다.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되기 전 여당 지도부가 DJ를 방문해 ‘계승론자’라는 덕담을 들었을 때 무척 반겼던 이들은 그 정지작업을 노대통령이 해주기를 바랐다. 당에서 기대한 정지작업은 신 건·임동원 전 원장에 대한 불구속 배려였다. 그러나 청와대 내에는 노대통령을 중심으로 원칙론자들이 다수이다. 여당과 달리 청와대 인사들은 김대중 정권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주류라는 점에서 이들은 DJ에 대한 부채 의식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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